두로는 오늘날의 레바논으로
페니키아 해안의 부유한 항구도시였습니다.
두로는 멸망하는 예루살렘을 조롱했습니다.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예루살렘의 심판은 마땅한 것입니다.
마땅히 심판받은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로 인하여 두로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심판은 마땅하지만
마땅한 심판을 바라보는 이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모세, 요나의 기사를 살펴보면서
또는 탕자비유의 첫째 아들의 태도를 보면서
자신의 죄로 인해 받게 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 저 사람은 심판 받을줄 알았어.
심판 받아 마땅해.”
이런 태도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기사에서 그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자신들이 유익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즐겼습니다.
이후로 나오는 두로가 심판받는 이유는
두로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입니다.
두로는 자신이 가진 부요함을 가지고
스스로를 신이라고 여길만큼의 탐욕과 교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 두로야 너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말하는구나.” (겔27:3)
성경은 두로가 아름답다고 말하고
그 근거를 20절이 넘는 구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를 세운 자들은 너의 아름다움을 극치에 이르게 했다. (겔27:4)
두로는 아름답습니다.
겉만 번지르한게 아니었습니다.
두로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두로와 무역한 나라는 스페인을 포함해서 22개국에 이릅니다.
하지만?그 아름다움은 유한합니다.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기던 두로는 한순간에
동풍이 불어와 바다 한가운데서 산산조각 날 것이라 말합니다. (겔27:26)
자신이 아름답다고 한 근거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리십니다.
신과 같다던 두로는
결국 스스로 자랑하던 지혜와 부로 인해 역설적으로 멸망할 것입니다.
“너는 네 마음을 신의 마음같이 여겼으니
내가 이방 사람들을, 가장 포악한 민족을 네게 데려올 것이다” (겔28:7)
주님 안에서의 지혜와 아름다움은 존귀함이 될 수 있지만
아름다움과 부요함, 지혜 그 자체를 추구하고 자랑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너는 학살하는 사람 앞에서?’나는 신이다’라고 너는 말하겠느냐?
여기서 신은 다른 여러 가지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자랑하는 무엇이라도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두로의 아름다움은 가짜로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진짜 아름다웠고, 지혜롭게 경영했으며
그 경영으로 주변 해양도시중에서 가장 번영했습니다.
하지만 한순간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고 끝장나 버렸습니다. (겔27:36)
우리가 몰두하고 목표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하나 근거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수많은 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켜켜히 쌓아올린 그 근거는 주님앞에서 유한합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출10:13)
동풍은 누군가에게 심판의 도구였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도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자신의 부요함이
한편에서는 심판의 이유라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합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것..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질문합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