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멜산은 바알을 숭배하는 본거지와 같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대결을 펼칩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의 외침은 허공을 쳤으며,
온 백성들은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하고
엎드려 소리쳤습니다.
“여호와,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바알 선지자는 그곳에서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3년의 기근이후 이스라엘에 비가 내렸습니다.
극적인 드라마처럼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되야 할 시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같지 않습니다.
영적 싸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살기 가득한 이세벨의 위협앞에 엘리야는 유대광야에까지 도망쳐서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청했습니다.
뜨거운 광야에서, 그늘 하나 만들어 주지 못하는 로뎀나무아래
지쳐버린 엘리야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지쳐버린 엘리야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여호와여,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니 제 목숨을 가져가 주십시오.
저는 저의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왕상 19:4)
불로써 응답하신 여호와 앞에 아무 변화없는 이스라엘과
여전히 기세등등한 이세벨의 날카로운 칼날,30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지 않는 세상의 견고함. 그 앞에서의 무력함.
지쳐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위로하십니다.
마치 혼자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짊어지거나 해결하려 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칠천 명을 말씀하십니다.
이 전쟁의 주인공은 엘리야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갈멜산에서의 전투 앞에서 성경은 오바댜를 통해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아합왕에게서 숨겨 돌본 이야기를 말합니다.
엘리야를 통해 전면에서 드러나게 일하는 것만이 사역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황은 우리가 예상한데로 전개되지 않지만,
상황은 우리가 예상한데로 전개되지 않지만,
그것으로 낙심하지만,
하나님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커다란 영적 승리로 모든 것이 바뀌어 질 것 같아 보이지만
사람과 세상의 변화는 쉽지 않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오늘의 순종이며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음 할 일들을 알려주시는데
그 중 하나가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왕상 19:16)
이후, 예후는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는 말로써
아합에 속한 사람들과 유다왕 아하시야의 친족들을 숙청했으며
바알 숭배자를 죽이고 바알 신당을 허물어서 변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예언한 것처럼
예후를 통해 아합가문과 이세벨을 철저하게 심판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 대를 지내리라” (왕하10:30)
예후는 오므리 왕조와?바알 종교를 뿌리뽑는 심판의 도구로 하나님께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역 그 자체에 철저하게 매몰되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그를 무섭도록 정직하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법을
지키는 데는 마음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죄 짓게 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왕하10:31)
여로보암은 하나님과 함께 금송아지를 섬기는 종교 정책을 펼쳤는데
예후도 이 정책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예후 왕조로 추정되는 시기의 당시 유물를 보면
예후 왕조로 추정되는 시기의 당시 유물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다른 신도 함께 섬겼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왜 사역에 실패했느냐고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낙심한 그를 위로하셨으며,
혼자서 사역했다고 지쳐 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님을
남겨 놓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님을
남겨 놓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후의 사역은 성공했고,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이룬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이루었다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역이나 공적으로도 그 자체가 주님의 기쁨일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역이나 공적으로도 그 자체가 주님의 기쁨일수는 없습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을 내가 돌볼 것이다.” (사66:1-2)
하나님은 어떤 사역을 이루어 냈느냐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의 상태를 물으십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당신의 말앞에 떠는 자를 돌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