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기독교계에서 여러 불미스런 사건들이 발생할때
나는 왜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것일까를 의문했습니다.
지인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다른게 아닐까? 라는 문제제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경험과 기억’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격하며 하나님을 섬겼을 때
그들이 내놓은 고백과 행동은 진짜이며,
그들의 저작과 작품들 모두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만으로 하나님을 해석하거나
타성에 젖거나,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잊게 되면서 점차 자신의 감각과 판단대로 결정하느라
돌이키기 힘들만큼 멀어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결국 하나님께 멀어져 버린 사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내가 보낸 수많은 시간과 날마다의 내면을 돌아보아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합 가문의 딸인 아달랴로부터
성공적으로 정치와 종교의 개혁을 이루어 낸
요아스왕과 여호야다의 경우를 살펴도 이해안되는 장면이 너무 많습니다.
40년 장기통치를 이루어낸 요아스왕은
성전을 수리하게 됩니다.
유다의 역사에서 성전에 손을 댄 사람은
유다의 역사에서 성전에 손을 댄 사람은
다윗과 솔로몬, 요시아 정도로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성전 수리가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오직 그 목적이었다면 다른 왕들도 앞다퉈
이런 방법을 사용했을텐데 그런 사례를 찾기 힘듭니다.
하나님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요아스왕을 교훈하는
모든 날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아달랴의 아들들이 바알을 위해
여호와의 성전을 약탈한 후 (대하 24:7)
요아스는 제사장들을 통해 성전을 수리할 것을 명령했지만
요아스는 제사장들을 통해 성전을 수리할 것을 명령했지만
제사장들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미온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의아스러운 것은 제사장 여호야다마저도
이들과 같은 행동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왕은 제사장들을 거치지 않고 공사를 맡은 이들에게
보수비용을 넘기는 방법을 사용해서 성전수리를 이루어 냅니다.
성경은 제사장 여호야다를 흠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성공적인 개혁을 이루어 냈고, 요아스왕을 주님 앞에 바르게 지도해 내지만
그또한 제사장 무리들과 같은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왕하 12:7)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을 통해
제사장보다 더 나은 신앙적 결단과 믿음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그때쯤 아람 왕 하사엘이 가드를 함락시키고?예루살렘을 향했을 때
요아스왕은 모든 성물과 성전과 왕궁에 있는 금을 조공으로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 후 요아스왕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
곧바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숭배를 장려했습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선지자가 높이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주의 명을 거역하느냐? 너희가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주를 버렸으니, 주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다.”(대하 24:20)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서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선지자를 보냈으나 (대하2419)
요아스왕은 명령을 내려
요아스왕은 명령을 내려
스가랴 선지자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아달랴로부터 죽게된 어린 요아스를?구해낸 여호세바와,
요아스를 왕으로 등극시키고 평생동안 그를 여호와의 길로 지도한 여호야다 제사장.
은인의 자녀인 스가랴를 돌로 쳐죽였습니다.
성경은 이런 요아스 왕에게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대하24:22)
결국 요아스왕은 하나님을 떠난 것과 스가랴을 죽인 일로 인해
일년 뒤,?아람을 통해 큰 피해를 입게 되고
상처 입은 요아스왕은 반란을 통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나는 요아스왕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린 이유가 궁금해서
며칠동안 이 본문을 고민하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첫번째 아람 왕 하사엘의 침공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제사장보다 성전을 보수하는데 열심이었던 요아스왕에게
자신의 신앙적 열정과는 무관하게 아람과의 물리적 충돌과
그로 인해 성전의 보화들을 이방인에게 조공바치는 굴욕적인 결과까지
요아스에게 이 사건은 큰 혼돈이었을것 같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믿어봤어. 누구보다 그를 사랑했고
그를 향한 열정은 종교지도자들보다 더할 정도였어.’
한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비록 아달랴로 부터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해 내셨지만
전쟁에 있어서 한심할만큼 무능한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인지했던 것은 아닐까요?
요아스왕은 하나님을 섬기면 이 땅에 아무 고난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면 그 분을 섬기는 자신에게는
어떤 고통이나 굴욕도 없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이 산산히 깨어지자
어떤 고통이나 굴욕도 없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이 산산히 깨어지자
요아스왕은 자신의 뜻에 반대할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고 난 후
급선회하여 우상들을 끌어들였던 게 아닐까요?
이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대국의 신들을 끌어와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요?
요아스왕의 실수는
자신의 고난이나 실패가
하나님의 무능력으로 말미암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요아스왕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실패는 아닙니다.
우상을 끌어들인 요아스에게
요람은 일 년뒤 다시 침공하게 됩니다.
아람군대는 적은 무리였으나
심히 큰 유다의 군대가 그들에게 패배했고
방백들은 죽었으며 물건들은 노략당하게 되었습니다.(대하24:24)
아주 적은 무리의 적군 앞에서도 우상들은 요아스를 전혀 돕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 우상으로 인해 하나님은 요아스의 반대편에 서셨습니다.
블레셋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대제사장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언약궤가 머무는 곳마다 당신의 영광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삼상6:20)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며,
우리가 실패처럼 여기는 실패가 완전한 실패 또한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