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의 일상 속 작은 행동을 보고
그 이미지를 오랫동안 잊지 않고
앨범 속 사진처럼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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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두한이가
며칠 동안 노숙하고 앵벌이를 한 어느 날,
나한테 심하게 야단맞은 적이 있습니다.
항상 웃던 두한이 눈에서 눈물이 찔금 나올 정도로?
혼을 냈으니까요.
골목 어귀를 걸어갈 때?
그날 밤도 어김없이 두한이가 헤헤 웃으며
내게 손 내밀어,?손잡고 걸었던 장면이라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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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아프리카에서 비전케어의
안과진료 캠프가 열렸을 때
구름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줄을 썼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자신들이 진료받지 못할까 봐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 줄에서 이탈하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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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시고 권구현 목사님이
순번을 정해 종이에 번호를 적으시는 장면이라던지..
숫자 적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숫자표 하나를 들고서야 사람들은 화장실에도 가고
시원한 그늘을 찾아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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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이 교회 쪽으로?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보폭을 조절해서 걸었습니다.
나는 숫기가 없는 편이라 가던 길을 걸어가시면
마주치지 않을 거리를 유지한 채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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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시는데
택배아저씨가 탑차에서 무거운 짐 하나를 내리시는데
유기성 목사님이 자연스럽게 아저씨에게 다가가
함께 도우셨습니다.
그 덕분에 거리 유지를 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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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목사님이 택배차에 다가가신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택배를 내리는 일은?그 사람의 역할로
생각해버리면 그만인데
목사님은 왜 굳이 자신의 걸음을 멈추시고, 방향을 옮기셨을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보폭을 유지하고
자신이 걷던 방향을 흔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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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신의 걸음을 멈추고, 다시 걷고
방향을 만들어 가는 것을 나는 유심히 살피곤 합니다.
그 각도에서 각 사람이 만드는 이미지를 앨범 속 사진처럼 마음에 담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이 내 마음에 크게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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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부터 주일 설교로?주기도문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설교 내용도 좋았지만
설교를 마칠 즈음 꺼낸 목사님의 고민 하나가 너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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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목자교회서는 예배를 마칠 때마다
다 함께 일어나 주기도문송으로?예배를 마무리했는데
몇 년전 부터 그만두었습니다.
이번 주부터 다시 예배를 마칠 때 주기도문송을 부르게 되었는데
유기성 목사님이 이와 관련해서 짧게 덧붙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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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송 같은 영성 있는 노래도 찾기 힘들지만
곡조에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매우 중요한 가사가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하옵시고..’
이 가사 ?앞에 들어가야 할 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이 문장이 빠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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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에서
이 앞 부분이 빠지게 되면
발생하게 될 심각한 왜곡에 대한 우려 때문에
주기도문송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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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의도치 않은 왜곡이
하나님을 인격적인 아버지가 아닌
기계적으로 용서를 남발하는 밴딩 머신으로
취급해버리지 않을까 우려했던 걸까요?
가사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이 부분을 마음에 생각하며 주기도문송을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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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길을 잠시 멈추고
과연 이렇게 걸어가면 될까요?
다시 묻고,?내가 걸어가는 보폭과
걸어가는 방향을 질문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수없이 흔들리게 되면
그렇게 만들어진 걸음은 하나의 경향성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아무리 흔들린 걸음이라도
그 궤적은 주님의 인도하심이라?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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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보시며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십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지만
가난한 자(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아멘. (시편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