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별이 빛을 잃어도

여인이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린
순전한 나드는 300데나리온의 값어치입니다.
1데나리온이 일꾼의 품삯과 같으니
베다니의 이 여인은 지금의 중형차 한 대 값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은 주변의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나님 앞에 순전한 마음을 드린 이들을

주변에서 비난합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삼하 6:20-21)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생각 앞에
나 또한 멈춰 서게 됩니다.
주님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달리게 될 텐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한 일을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일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외에 시간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베다니의 여인이 마리아라면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때가 가까웠음을
직감하였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여인이 그저 주님을 사랑하는 
순전함으로 옥합을 깨뜨렸다면
그가 드린 이 헌신을 
하나님은 예수님의 장례에 사용한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시선을 내게로 돌려 나는 묻습니다.
마지막 시간을 살고 있다 말하는
지금 나는 무슨 마음인가?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이 같은 헌신을 비난하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득한 먼지들로
나무와 풍경들이 희미합니다.
달과 별이 빛을 잃어도 
여전히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오늘과 내 일상 속에 여전히 주권을 가지신

주님의 시간을 감사로 고백하는 것이
그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민란이 날까봐 유월절에는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려 애썼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막14:1-2)
예수님은 시간과 역사의 주인으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장례를 준비하십니다.

 

나병환자 시몬의 집,
병들고 누추한 내 마음에 오신 
값비싼 향유보다 더 값진 어린 양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