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다면
우리는 그런 말도,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텐데요.
우리는 그런 말도,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텐데요.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에
불꽃이 붙었습니다.
불에 타서 사라져야 할 가시나무는
계속해서 불타오르고
주님은 그 앞에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출3:5)
바로의 명령으로
히브리인 남아들은 다 죽임을 당해야 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계획을 이미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바로의 딸에게 건짐받은 모세는
당시 최고학문이었던 이집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로 내몰림으로써 무능력한 인생을 철저히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40년의 시간.
그 시간은 모세로 하여금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듭니다.
그때 시내산 광야에서 모세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그 시간은 모세로 하여금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듭니다.
그때 시내산 광야에서 모세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어디가 거룩한 땅인가?
무기력하게 광야에 머물던 모세의 일상에
주님이 찾아오시자, 그 곳은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머물고, 주님이 일하시는 곳이
바로 거룩한 땅입니다.
이미 40년의 시간동안 머물던 곳은
주님이 찾아오시자 그는 신을 신고 머물지 못할 성전이 되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만물보다 부패해서
불에 타서 사라져야 할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
내가 바로 그 곳입니다.
만물보다 부패해서
불에 타서 사라져야 할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
내가 바로 그 곳입니다.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게
걸어다니는 나의 광야, 일상이 머무는 곳에
주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모세의 40년이 내게 어느 지점이 될지 알지 못하지만
가시나무 떨기에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을
주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모세의 40년이 내게 어느 지점이 될지 알지 못하지만
가시나무 떨기에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을
내보이는 곳은
아주 먼 땅이라던지, 거룩해 보이는 지점이 아니라
일상이 이어진 시간과 공간 입니다.
내 부끄러운 시간과 발걸음들이 연결된 지점이기도 합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오늘 내가 선 곳,
부끄러운 지점 가운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상의 걸음이 곧 거룩한 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