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데의 이야기를 다룰 때
짝을 이루는 예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패턴의 예상되는 결론은
어딘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다.
베드로가 탈옥 후
마가의 다락방 문을 두드렸을 때
사람들은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다는
로데의 말을 믿지 않았다.(행12:15)
이 본문에 짝을 이루는 예화는
흉년에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우산을 가지고 온 사람은 아이 한 명 뿐이더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가 마가다락방으로
정말 돌아올는지는 모르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들의 기도의 내용을 모를 뿐 아니라
주님이 이루실 뜻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야고보는 죽임을 당했지 않은가?
나는 성경을 보고 이 상황의 결말까지 전지적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아직 경험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언젠가 하나님은 내게 가르치시셨다.
답과는 거리가 먼 자신만의 답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치를 넘어간 이유로
더이상 그림 그리지 못하기에 틀렸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상황을 믿음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가혹하지 않은가?
그들은 이런 시간을 통해 배우게 된다.
강조점을 실패가 아닌 과정에 찍을 수 있다.
사도행전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교회 구성원의 불명예스러울 수 있는
이 상황을 적어 놓았다는 말은
전략적인 진술이라는 예상도 하게 만든다.
동시에 예수님이 죽으신 후 부활하셔서 사람들을 만나신 것처럼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도
죽임 당한 후 그의 천사로 자신들을 방문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베드로의 기도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쳤고
죽었던 도르가도 살아났을 정도로
그의 행적이 예수님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아직 신학적 토대가 만들어지지 않은 당시는
모든 것이 처음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쨋든,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는 듯한
당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부족하고
불완전한 기도를 통해
주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순종하여 드리는 기도 마저도
주님이 받으시다.
그것은 믿음 없음을 꾸짖을 것이 아니라
실날같이 작은, 겨자씨 같은 믿음과 순종을 기뻐해야 할 일이다.
2. 세례요한, 야고보.. 하나님의 사람들을
여럿 죽인 헤롯은 결국 교만이 원인이 되어
주님이 치신다. (행12:23)
작은 유대땅 구석을 통치하는 왕은
자신이 마치 신이 된 것처럼 기고만장했다.
헤롯이 아니어도, 자기 동네의 골목대장이 되어도
기세가 하늘을 찌를 수 있다.
얼마전 행사에서 시의원들을 여럿 만났다.
충격적일만큼 사람을 무시하고
으시대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모든 옷을 벗은 후, 모든 타이틀을 벗은 후
우린 누구여야 하는가?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