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네 사람의 정결예식 비용을 댔다.
나실인의 정결례는 상당히 큰 비용이 든다.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 소제물과 전제물..
바울이 이런 비용을 댄다면
유대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오해를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쉽지 않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많아지면서
그들은 여전히 율법에 열심인 사람이기에
바울에게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싶지만
해명한다고 이 문제가
간단하게 풀어질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이방인은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간단하지 않는 설명을 하는 대신,
교회 지도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바울은 정결예식의 비용을 대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안에 이런 갈등과 오해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옳은 것을 택하기 위해
전심을 다하지만 결과적으로 양쪽이 피투성이가 된다.
주님의 마음이 무엇일까?
이 장면에서 바울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비본질에 대한 것이라면
자신이 대가지불을 해서라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낮춘다.
물론, 이 일의 결과는 바울에게 위태로운
상황으로 흘러갔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