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중요하다 해서
말씀만을 집중하게 되면
메마르고 건조함을 느낀다.
그러면 기도와 영성을 강조하게 된다.
기도하고 기도하다보면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 집중하게 되면
무엇인지 빈약한 기초를 느끼게 된다.
개인의 영성과 구원을 강조하다 보면
사회적 영성과 공동체와 사회정의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쪽과 저쪽, 저쪽과 이쪽을
두루 경험하며 한 쪽의 논리와 생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힘의 균형들을 보게 되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주권,
도대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을까?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이 가지고 있는 로마시민권은
매번 로마인으로 하여금
그의 신분를 보장받게 된다.
빌립보의 감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도 그는 특별한
신분을 확인받게 된다.
마치 암행어사출두를 외칠 때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바울은 사건의 초기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 타이밍은 항상 바울에게
가장 유리한 지점만은 아니었다.
손해 보지 않을 타이밍에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적절한 타이밍.
복음을 전하는데 문제 없을..
나의 정당함을 매번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다.
바울에게 복음이 우선순위에 있었던 것처럼
내게는 무엇이 우선순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