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까지 모든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행22:1)
바울의 말에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했다.
바울의 말, 곧 선한 양심으로 살았다는 말은 무엇일까?
그는 사도행전에서 이미 본 것처럼, 그의 서신서에게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처럼
죄인이며 실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았다는 말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실수를 했을 경우에
다시 선한 양심을 따라 다른 선택을 한다.
자신의 입을 치라고 한 사람이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행22:5)
대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얼마전 한 회사의 CEO를 인터뷰했는데
그는 법과 가치와 규범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오래된 전통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기준이다.
기준이 없다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사회 속에
기준으로 정해져 있는 권위 자체를
붕괴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이라는 진리가 빛처럼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기존 무리들은 철저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공회에서는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 사이에 분쟁이 생긴다.
이 무리들 속에도 각자의 기준이 있다.
기준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기준과 법이 진리라고 믿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혼란의 밤,
그날에도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다가와
말씀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행22:11)
주님이 길을 인도하신다.
잘 가고 있는 게 맞는가?
이 혼란속에 나는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밤에 주님은 바울에게 그렇다고. 잘 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나침반이 아니다.
주님이 나의 갈 길을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