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청년 한 명

대단한 컨퍼런스에 참석한 일이 있다.
나는 기질상 작은 테이블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는데
한 목사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대단한 목사님 한 분이 들어오셨는데
나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던 목사님은
나를 팽개치고 그 분에게 눈과 몸의 방향과 마음까지
쏟았다. 정말 쏟는 것 같았다.
자주 보는 풍경이었으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힘있는 사람, 자신을 도와줄 사람에게
사람들은 온 정성을 쏟으며 자신을 어필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역사속 많은 이야기에는
바울같은 사람 뿐 아니라 
그저 청년으로 기록된 사내들을 통해
역사의 흐름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40명의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스스로에게 저주의 맹세를 씌우면서까지
결연한 의지를 품은 무리들이 있었다. (행23:12-15)
지금이 아니라 당대에 그 정도의 의지를 가진
숫자가 모였다면
바울은 다음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정상이지만
 
바울의 생질, 청년 한 사람이
이 모의를 알게 되고 바울과 백부장과 천부장을 
거쳐 이 사실을 알리게 된다.
결국 바울은 호위병 470명과 함께 가이사랴로 향하게 된다.

어찌된 전개인가?
알 수 없지만
내가 주목하는 몇 가지는.
이 흐름의 전개에는 이름모를 청년 한 명이 있다는 것과
이 사건이 있을 전 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행23:11)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지만
감사한 일은, 주님의 말씀이 우선이었다는 사실이다.
담대하라.
 
주님이 내게 두려워말라, 담대하라 말씀하시면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씀앞에 반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