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동행한지
사흘이 지났지만
먹을 것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먹을 것이 없음에도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했다.(막8:2)
좋은 말, 귀한 말도 중요하지만
이제 생계를 돌보러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함께 한 이들은
또 한 번의 구원을 맛보게 된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셨다.
나는 예수님을 기복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주의한다. 자칫 밴딩머신처럼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해야 하는 한 면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의 영적인 측면만을 말하지 않는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신다 약속하신 주님.
이 약속조차 얼마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가?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현실의 삶을 살아아갸 한다.
떡 일곱개와 생선 두어마리로
남자만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
제자들은 앞서 예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것처럼 반응한다.
나도 마찬가지는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이 놀라운 사역에
동참시키신다.
마가복음에 드러난, 이해가 느린 이 제자들을
어떻게든 이해시키고, 어떻게든 함께 하신다.
바리새인들이 이 소문을 듣고
자신의 눈앞에서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구했다.
마치 지금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듣지 못한것처럼.
예수님은 계속 탄식하신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에게
탄식의 몸짓으로 열리라, 말씀하신 것처럼
이 시대를 향한 안타까움.
“어디 한 번 증명해봐.”
다윗이 나발 앞에서 분노할 때도
자신의 주인에게서 도망한 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어디 한 번 증명해봐.”
“너의 능력을 보여봐.”
믿음을 보이라는 원수의 도발앞에
나는 무엇을 증명해야 할까?
나는 평범한 일상을 주님의 음성에 의지한 채
살아가야 한다.
평가는 원수가 아니라, 주님이 하실 일이다.
하늘을 명령해서 표식하고
자신을 증명할 수도 있는 분이시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을 담보해주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