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따르지만
줄곧 자신의 입신양면을 생각하는 제자들과
대조되는 인물이 있다.
바디매오는 내일이 전혀 보이지 않던 사람,
눈먼 사람이었으며 길가에 앉아 구걸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던 사람이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드물게 믿음을 칭찬하시는
사람들이 나온다.
중풍병자의 친구, 혈루병을 앓던 여인,
그리고 바디매오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막10:52)
바디매오의 믿음, 무엇을 주목해야 할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막10:47-48)
소리치는 바디매오를 향해 많은 사람들이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크게 소리질러 예수님을 불렀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주님을 찾았다.
그가 소리 지른 지점은
‘나사렛 예수’시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였다.
그는 나사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들은 소리를 외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믿음을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말과 동의어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 뿐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서도 무능력하시거나,
무가치한 분으로 폄하한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내가 믿는 믿음은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성품에 기대어 소리쳤다.
그 분의 자비와 긍휼앞에 문을 두드렸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막10:51)
예수님의 같은 질문에
세베대의 아들들은 다른 것을 구했다. (막10:36)
예수님은 내게 물으신다.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언젠가 미국동부를 기도하며 다닐 때
하나님이 내게 같은 질문으로 물으셨다.
“예수님을 보고 싶습니다.”
진심이었다.
텅 빈 시간앞에서 나는 충분히 허기졌고,
빈 마음을 채울 분은 주님뿐이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게 소원이 아니었다.
흔히,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가
세속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기복적이다.
주님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바디매오가 보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님은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바디매오는 보게 된 후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 (막10:52)
고난과 죽음, 십자가가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게 소원이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모범 사례가 된 이유는
예수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의 사귄이 그 다음 걸음으로 이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을 따르는 바디매오가
제자들과 비교되지만,
과연 그는 예수님을 따를 자격이 되는가?
좀전까지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이었으며
먼지 나는 여리고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혀를 차며 불쌍히 여기던 그가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자격을 가졌는가?
어떤 지위와 학력을 가졌는가?
미천한 수준과 자격을 가졌다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다.
명망있는 부자청년의 이름은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마가는 그를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말한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며,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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