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일까?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막11:15-16)
흔히 생각하는 예수님의 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
그리스도인은 감성적인 예배와 기도,
고상한 인격을 탐구하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래서 평소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들여다 보게 된다.
성전 안에서 상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수님은 분노하신 것일까?
부분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들(사56:7, 예7:11)을 인용하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라고 말씀하신다.
기도하는 집에서 본질과 무관한 일들이 주가 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상거래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
성전에서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지불해야 하는데
흔히 통용되는 돈이 아닌 성전에서만 사용하는 돈을
바꾸어야 했고, 이에 대한 수수료가 있었다.
비둘기 또한 가난한 자들이 바치는 예물로
매매상들은 이를 통해 폭리를 취했으며,
그 배후에는 대제사장이 있었다.
단순히 성전에서 상거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
온 세계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의 마음과 잇닿아 있어야 하는 본질 앞에서
너와 내가 나뉘어져 있고, 사람과 사람이 나뉘어져
기도와는 전혀 다른 비본질에 몰두하고 있는 종교의식에 대해
성전의 주인되신, 성전이신 예수님은 분노하고 계신것이다.
마치 믿음의 선언으로 선포되는 고르반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내는 절세의 방편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에
아무 것도 열려 있지 않았다.
때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아주 작은 열매도 없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종교적인 모양과 포장은 가득하지만
작은 열매도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열매 맺지 못한 나무를 향해 예수님은 저주하신다.
나는 과연 열매 맺는 나무인가?
열매는 스스로 맺지 못한다.
의식이나 의지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
열매 맺게 하는 생명 나무에 내가 깃들어야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