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면 알 수 없다.
그것은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모르던 사람의 재스처를 버릇을 의도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 당연히 알게 되는 것,
예수님은 영업시간과 폐점시간을 말씀하지 않으신다.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 닭 울때, 새벽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막13:35)
깨어 있는 것을 물리적으로 눈을 뜨고 있는 것으로
적용하게 되면 우리는 이틀도 못가서 넘어지게 된다.
하지만 주님과의 관계다.
항상 기도가 가능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나는 무엇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가?
며칠간 책상에 앉아 머물 시간조차 없었다.
두어시간 잠자는 시간,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는 끊임없이 주님을 초대해야만 한다.
내 할 일을 다 하고, 이제 일을 끝냈으니 주님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통해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책이 나오고 예상했던 대로 여러 공격들이 있다.
내 의도와 상관없는 악의적인 메세지들.
침묵한다. 모두를 다 도울수도 없다.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 사람의 속성을 생각한다.
내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존재임을 생각해야 한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어쩌면 세상에 홀로 살아가는 개인이다.
하지만 동시에 주님은 당신의 생명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빈 마음은 주님이 채우시고, 나는 주님의 마음으로
화평케 하는 자로 하루를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이 실패했다 생각한 순간,
우리의 인생은 부도날지 모르겠지만
그때 기도하는 것만으로, 우리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매순간 매순간 오늘 새로운 피조물로, 주님의 보혈로
살아갈 수 있다.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기준들이 있다.
그 기준은 엄격한듯, 자주 허물어진다.
매일의 반복된 훈련, 순종, 하지만 작고 반복적인 걸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