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로부터 돌려받았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제사로 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직전에 하나님의 개입으로 멈추긴 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이미 이삭은 하나님께 드림바 되었다.
결과 그 자체로 판단할 수 없는것이 많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아신다.
그저 일상을 살았을 뿐이지만, 이스라엘 역사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일상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다윗을 주목하여 보셨고
이새의 첫째 아들 엘리압은 하나님이 버리셨다.
시간 너머를 아시고, 시간 너머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앞에 나는 오늘 어떤 마음을 살아야 하는가?
장학재단 수여식을 마쳤다.
일 년에 가장 신경써야 하는 행사인데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감사한 시간이었다.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아이들의 시선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이사장님의 의견으로 모두에게 손을 잡고
찬양의 구절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과 해야 할 이유.
그 속에서 잘 끝났다.
그러고 보면 하지 말아야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것 저것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 성향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날마다 구해야 하는 이유다.
모세는 왕의 아들로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써, 사명으로 살아갔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80살이 될때까지 모세를 기다리고 만나시지 않았다.
주님의 적절한 타이밍은 오늘도 계속된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을 수 있겠는가? (히11:37)
믿음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히11:38)
여기서 사용한 단어는 저울에 무게를 달았을 때
합당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세상과 그리스도인은 같은 무게, 같은 기준, 같은 가치가 아니다.
도리어 저울로 비유하자면 세상의 무게보다 그리스도인의 무게가 더하다.
다른 번역서들에는 이 말을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없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히11:40)
더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항상 정답이지만
성경의 약속 또한 분명하다.
세상의 무게와 기준 앞에서 나는 두렵지만
긍정적인 사고로 이겨내야 할 곳이 아니라
세상과 나와의 부조화속에
끊임없이 믿음을 싸워나갈 곳이 현실세계이다.
요는, 세상속에 나를 향한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외로움과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