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과 속상함, 의문과 고민,
여러 시간을 보내며 나는 주님께 묻는다.
그리고 주님은 여러 통로를 통해 내게 보인다.
나는 오늘을 살지만 오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실 때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소망함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살았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2:20)
이 위대한 고백은 어떤 맥락에서 말하고 있는가?
위대한 사도인 베드로 뿐 아니라
베드로의 외식으로 인해
바울의 가까운 동료인 바나바까지도
믿음이 아닌 유대인의 혈통에 기대었다는 내용에서 이어진다.
구원의 주체는 혈통이나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새로운 법을
자신의 몸으로 만드셨다.
나는 그가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이며
그 분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
그 믿음은 나의 오늘을 만들어갈 것이며
그 걸음속에서 주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구원의 근간이 될 것이다.
믿음은 믿음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며칠동안 지금 시대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갖는 의문과
고민과 울음앞에 묻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의 아픔과 고민의 수준에 까지 낮아져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수준까지 성육신하신 것처럼.
그래야만 답이 답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민에서 시작된 답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인 답은 주님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사단은 마치 하나님이 악독한 주인으로
우리를 괴롭고 반복되는 인생을 살아가게 만들었다고 오해하게 만든다.
사실은 지옥같은 세상에 하나님은 친히 들어오셔서 우릴 구원하신 분이시다.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시대.
너무나 달콤하고 자극적이고 빠져나오기 힘든 늪에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광야로 이끄는 것,
완전히 납짝 엎드러지는 시간
울 수 밖에 없는 시간은 우릴 낮추셔서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알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인지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