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모임에서 아내가 눈물을 쏟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의 눈물을 보고 있자니 나도 눈물이 흐른다.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해 특별히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얼마전 믿음의 동역자가 떠나갈때도 그랬다.
그분과 특별히 가까이 지낸 사이도 아니었지만
장례식장에서 눈에 부을만큼 울었다.
나는 그때도 아내의 눈물을 보며 함께 울었다.
쉽지 않은 시절속에 여러 고민과 아픔이 있다.
의문과 회의와 믿음. 수많은 생각속에서
내 마음을 다지는 한 가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주권이다.
눈에 거슬리는 문제들과 정치와 불의해 보이는 상황앞에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도무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주권.
야곱의 집안에 있었던 철저한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셨으며
이 일을 통해 여전히 주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보이셨다.
블레셋에 빼앗긴 법쾌가 하나님의 패배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그렇다면 나는 날마다 주님 앞에 반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할 수 없다.
모든 사람과 갈등없이 지내고 싶지만
엄밀하게 생각하면 둘 사이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은 무슨 뜻인가?
감당하다는 뜻을 가진 ‘악시오스’는
저울로 무게를 달았을 때 적당하거나 합당하다는 뜻을 가졌다.
주로 복음서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마3:8)를 말한다.
탕자는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눅12:48)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뜻은
곧 세상과 믿음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무게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한다. (갈6:17)
그는 할례자들과의 보이지 않는 논쟁을 통해
몸에 낸 흔적, 몸에 낸 상처가 아니라 예수의 흔적을 이야기한다.
몸에 낸 흔적이 필요한 이유는 앞서 베드로와 바나바를 향한 외식,
곧 갈등과 핍박을 피하는 방법으로의 할례자들과 구분되는 짖넘.
예수의 흔적, 갈등과 핍박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오늘 내 삶과 일상속에 어떤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
그것은 고난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내게 익숙한 풍경을 벗어난, 일상의 반복되는 시간속에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음속 아픔과 눈물, 그속에서 주님의 흔적을 찾으며
여전히 함께 하시는 주님의 샬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