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 앞에 다윗은 흥분했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그의 이름이 어울리는 자라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분노를 거두게 됩니다.
사람들을 만나며 오해하거나 오해를 받거나
반응 앞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의문하게 됩니다.
그저 가만히 있다가 바보가 된 적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방법은 다릅니다.
내게 주신 지혜,
그 지혜를 믿고 기계처럼 행동하지는 말라고.
언젠가는 그저 울라고,
언젠가는 그저 품고 버티라고,
언젠가는 진흙을 묻히라고..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방식은
항상 다릅니다.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던 주님,
주님이 말씀하셨기에 마리아는 그 시간을
약속의 성취라 생각하고 걸었겠지요.
반응 앞에 반응하려는 내 의지를
십자가 앞에 죽입니다.
답답함을 주님앞에 푸는 대신
사람에게 말하려는 욕망을 찍어 누릅니다.
주님, 주님이 내안에 계셔
나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늘은 특별한 만남과 시간이 있었습니다.
만남과 시간이 특별한 게 아니라
여전히 일하시는 주님을 보고
웃게 되어 감사한 날이었습니다.
만화 주인공이 되어
구름떼 같이 허다한 증인들앞에서
자유하되 종이되며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중심잡기 힘든 시간을 살아가는 것 아닌,
지붕에서 멋진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줄 수 있다면.
주님은 내게 지붕 위에 올라 앉으라고도
멋진 연주를 들려주라고도
왜 능력이 없는지도
왜 말을 못하는지도
왜 거룩하지 않은지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채
내게 와 그저 울어라 말씀하십니다.
나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몸, 나의 살, 나의 피를 뜯어
너는 살아라.
나는 죽을테니 너는 살아라.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