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 다차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낮은 차원의 존재는 그보다 고차원을 이해하기 어렵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사단의 궤계앞에서도 쓰러진다.
항상 기도에 힘쓰고
기도 가운데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기도함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된다.
무엇보다 이 싸움의 근원과 원천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게 된다.
싸움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너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기도하지 않으면 이 싸움의 중심을 잡기 힘들다.
기도는 쉽지 않다.
하지만 기도가 기도를 가르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분명한 기도제목을 준다.
그리고 이 기도가 목적하는 방향이 분명하다.
비밀의 문은 그냥 열려지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닫으려는 자들과의 치열한 격전지다.
세상을 바꾸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대신
오늘 내가 주님을 만나 순종하는 것이
그보다 실제적이다.
나타난 결과를 목적으로 품으면
신기루를 찾아 헤매게 된다.
나는 오늘 주님을 만나 걷는것
여러 조언을 나누었다.
그런데 내가 말한 조언이 너무 계산적인건 아닌가
나에 대해서는 이상적이지만
사람들에게는 조심스럽게 조언하게 된다.
그들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걱정하는 것일까?
주님앞에 유의미한 것이라면 그들에게도
믿음의 항해를 조언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조언하지 못한 이유는
믿음의 항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선택해야
더 오랫동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른다.
내 말에 떠밀려 선택하게 되면
얼마 못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