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러 아이들을 만났다.
그 중 한 아이가 내게 안겨와서 놓지를 않았다.
주변 아이들이 내게 물었다.
“이 아이 아빠예요?”
아니라고 대답했다.
동생들에게 부모의 사랑을 빼앗겼다 생각했던지
내게 안기며, 아이는 내게 아빠라고 말했다.
“내게는 소명이라는 아이가 있어. 나는 소명이 아빠란다.”
아빠가 아닌 아저씨에게 아무리 안겨봤자
나는 그의 아빠가 아니다.
정말 아빠가 없는 아이라면 고민해 보겠지만
아빠가 있는 아이는 이 범주에 들어오지 못한다.
말씀은 문제 앞에서 구체적이거나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늘 우선순위에서 뒤처지게 된다.
하지만 말씀이 없으면 방향을 잃게 된다.
내 생각에 옳은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의 사랑을 묻는다. (렘2:1)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 보이는 곳에
그들은 하나님만을 바랐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시고
열매와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셨다. (렘2: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선하신 인도하심이다.
하지만 누리고 누리는 선한 것으로
땅을 더럽혔고, 기억을 혐오스럽게 만들었다.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당연한 이 질문을 묻지 않았고
종교지도자들 조차 이렇게 묻지 않았다.(렘2:6,8)
주님의 답답함,
내게 물었다면, 나를 찾았다면
나는 응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주님이 없는 것처럼
아니면 조금 더 효과있는 신이 있는 것처럼
주님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주님은 계시지만, 아무도 주님을 찾지 않았다.
대신 무익한 것을 따랐고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했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신이었고
내가 바라는 것을 경배했고,
그들에게 드림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자신이 믿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아내에게 프로포즈를 할 때
이 말을 했다.
“나는 너의 빈 마음을 채울 수 없고
너도 나의 빈 마음을 채울 수 없어.”
사람은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한다.
무엇으로든 채우고자 하지만
거품과도 같은, 연기같은 것으로 채우지 말아야 한다.
나는 아빠가 있으며 아빠를 찾아야 한다.
아빠가 아닌 돈 많고 부유해 보이며, 사랑이 많아 보이는 아저씨는
내 아빠가 아니다.
예레미야의 메세지에는 신혼의 모티브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사랑은 영적 간음과 같다.
정말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