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부모는 알기 쉬운 존재여야 한다.
언제 아빠가 속상하고, 어떤 행동이 아빠를 화나게 하는지,
하지만 실수는 괜찮다. 실수를 통해 자라나니까.
하지만 고의적인 실수는 괜찮지 않다.
그것은 말그대로 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몇 번 주의를 줬지만 계속 장난을 치다가
결국 사고를 내는 경우다.
유다는 영적간음을 하며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고 있다.
배워서 아는 하나님의 성품.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내 어릴 때부터 친구입니다.
내게 계속 화내시겠습니까? 끝까지 노하시겠습니까?” (렘3:4-5)
그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다.
그것은 수많은 신들 중 하나로 하나님을 전락시키는 것과 같으며
비위 상하지 않게 놀아주는 행동과 다름없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산들마다 그들은 행음하였다.
목적은 자신들의 풍요였다.
풍성한 비를 원했지만 도리어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다. (렘3:3)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귀를 막고 자신들의 말만 쏟아낸다.
하나님은 유다가 말한 그대로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이스라엘은 이미
당시 100년이 넘은 사건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멸망한 이스라엘을 향해
여전히 내 자녀라 부르며, 내가 너희 남편이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성품을 귀로 듣고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의 차이.
사랑할 때 가질 수 있는 시행착오가 있다.
하지만 그런 시행착오는
상대를 이용하고 입바른 소리로 즐기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주님 앞에 비록 제대로 걷지 못할지라도
주님을 바라고, 그 분의 이끄심을 구하는 것.
주님이 내 남편이십니다. (렘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