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한 주, 내지 두 주마다 가까운 이들의 장례가 있다.
결혼이나 돌잔치가 이어지는 나이가 있고
이제 장례를 만나게 되는 나이가 되었나보다.
늦기전에 서로에게 감사한다는 일상의 대화가 필요하다.
누구나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랑안에 갈등까지 넘겨 받는다.
상처는 이웃집이나 미디어와 비교해서
만들기도 하고
서로 다른 기질 때문에 생길 수도 있다.
작은 차이가 상처를 만들 수 있고
시대의 흐름과 강조점이
서로의 다른 기질이 상처를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을 지켜보며 알게 되는 것은
누구나 상처 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예민하거나, 여린 부분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누구에게나 양면이 있어서
하나님이 어떻게 조명하느냐에 따라
그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 모든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될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전혀 중요한게 아닌게 되고,
내가 들여다 보지 못했던 가치들,
생각으로 그쳤던 말 한 마디
그때 한 번 더 안아주지 못했던
그때 내가 한 번 자존심 꺽지 않았던 장면
그때를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실텐데
이 바람은 구별하거나, 깨끗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임한 심판처럼 심판의 선언이다.
만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면
오래동안, 기다리시고, 오래 참으심을 전제한다. (렘4:12-13)
사람과 교회와 세상을 향한 눈을
내게로 돌린다.
예레미야의 울음.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렘4:19)
그들과 나를 구별하는 지점이
내가 울어야 할 시작이며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끌어안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