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되기를, 잘 살아가기를
누구나 꿈꾼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잘 되기 위해
힌놈의 아들 꼴짜기에서 자신의 자녀를 재물로 바쳤다.
어쩌면 그들은 첫 소출은, 처음 난 자식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신의 아들을 희생했을지도 모른다.
잘 되기 위해서,
그리고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부족해서
이방 종교와 풍습을 잘 섞었는지 모른다.
여호와를 섬길 뿐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까지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내가 그의 백성이 되지 않으면,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나머지가 부속물이 되면
꼭 하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가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자신의 아들들과 딸들이 불에 태워질때
그들은 자신의 순종과 헌신에
고통하면서도 희열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명령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떠올리지도 않았다.” (렘7:31)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유사한 일을 지시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어긋난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생각한다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은 자신안에 있는 우상과 실상
순종과 사랑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순종의 끝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마음 조차 아신바 되었다.
하지만 최종적인 목적은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데 있지 않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간 그 곳은
모리아산, 그곳에 몇 백년의 시간이 흘러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지어진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의
회복이 힘든 자신의 백성을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내주신 바로 그 장소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하는 순간
멈춰졌고, 헤프닝에서 마무리되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처절하게 죽이심으로
자신이 처절하게 고통당하여 죽으심으로
나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단순한 인신제사의 표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담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사건이다.
모두가 잘 되기를 꿈꾼다.
자신의 꿈을 이루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사람도 있다.
사실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을 초대하고 초대하며
내가 앉은 주인의 자리를
주님께 내어 놓는 사귐의 시간,
주님과 호흡하는 매일의 오늘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천사원에서 네 살 난 아이가
선생님들을 구분해서 엄마 혹은 이모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엄마의 역할을, 엄마가 아닌 모두는 이모라 부르는 것 같았다.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라 믿었던 사람은 기관에 채용되어 있는 동안만
엄마의 시효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마음에 슬픔이 있었다.
늦은 밤,
가까운 지인을 초대해서 함께 저녁을 먹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다.
지인의 아버지가 암전이로 다시 위급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원하지 않는 세상,
목마른 세상속에 주님 한 사람, 또 한 사람 찾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