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전쟁영화에서.
주인공과 가까운 곳에 포탄이 떨어지면
영화는 모든 소리를 없애고, 웅.. 하는 소리를 들려준다.
아주 단순한 편집 효과로, 현실은 급격하게 비현실을 연출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잃어버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비현실적인 빈들에서 애가를 부른다.
그곳에 가득했던 새와 들짐승도 모두 사라졌고
목초지에서 들리던 소리도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말그대로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된 것이다.
승냥이만이 그곳을 어슬렁거릴 뿐,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되었다. (렘9:10-11)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하나님은 이 답을 찾는게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이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
문제는 너무나 쉽다. 자신의 뜻을 따라 잘 살아보기 위해
바알을 숭배하고 영적간음을 범했기 때문이다.
잘 살아가는 것, 온갖 규제를 없애고, 권위란 권위를
바닥에 내버리고, 자신이 왕이 되어 살아가는 것.
시대의 갈망이 확장되어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과연 믿음을 볼 수 있겠는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딸 온유에게 말했다.
비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거라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으로는 충분하지만
베드로가 요한의 운명을 주님께 묻는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게 된다.
내게 충분한 주님의 은혜가
사람들과 비교하는 순간 부족한 은혜가 되어버린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
나는 충분한데, 함께 잘 살아가기를 꿈꾸기에
쉽지 않은 인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시간을 통해 변증을 더욱 배울 것이다.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깊이와 고민
그래서 나는 매일 감사할 것이다.
주님의 작은 도구로 사용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