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며
어떤 시간을 살아야 하는가?
왜 그래야 하며, 왜 그렇지 못한가에 대한
수많은 질문앞에 나는 내 생을 살면 된다.
세상은 왜 이런가?
이 질문앞에 나는 많은 의문이 있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이 오시길 바라는가?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예수님을 보고 싶지만
절망적인 구조가 깨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만큼 나는 간절히 바랄까?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그 앞에서 얼마나 관념적인가?
하지만 조급해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문제의 실체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답도 그에게 답이 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이 심판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로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사안이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그들의 세계관을 넓혀주라고
말씀하셨다. 경험하게 해주라고,
알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겨 경험하게 해줄것인가?
할례는, 언약백성의 표징이 맞지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증명하지 않는다. (렘9:25-26)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이들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곳은 절망이다.
성경은 현실을 현실 그대로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의 참혹함과 외로움.
만일 내게 공허함과 아픔과 외로움이 있다면
다른 것으로 재미를 줄 수 있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할 수는 있지만
완전한 해갈을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과 깊이 있는 사귐이 있다면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지만
문제가 안고 있는 무게는 분명히 변한다.
모든 문제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