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당장 내 주변에도 믿음의 길을 걸으려 하지만
쉽지 않은 환경 때문에 위태하고 두려울때가 많다.
각자의 상황이 다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아서
그저 주님의 바라보는것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을 바라보는게 답이라면
계속된 예배가 답인가?
주님이 답이지만, 우리가 연상하는 것들이
답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이스라엘의 희생제물이
소용없음을 말하고 있다. (렘11:15)
희생 제사를 드리면 자신이 지은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
모든 일이 승승장구했던 일이
역사를 들여다 보아도 많지 않았음은
이 문제가 수학 방정식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모를 때,
이 나라에 속한 수많은 신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심판을 유보하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무속인의 수를 100만명이라고 추정하는데
무속인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를 추가하면
지금 하나님이 유다에게 진노하시는 숫자를 능가하지 않을까?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렘11:13)
나와 상관없는 죄악인가?
자신과 상관없는 나의 죄를 짊어지신
주님의 댓가앞에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나를 평가할 수 없고
오늘 내 상태뿐 아니라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요셉의 꿈을 통해
요셉이 총리가 되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자임을
계획해 놓으셨지만
요셉을 시기한 형들의 질투와 음모,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이 모든 시간 또한 실제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부으셨지만
다윗의 현재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답답한 오늘이다.
답답한 오늘, 나는 무엇을 볼 것인가?
그 답을 알 수 없어서
풍요로움의 상징인 바알과 아세라를
자신들의 성읍의 수와도 같은
신들을 섬긴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적 주군을
모시는 무속인 만큼이나
철저하게 현세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두려울 때가 있다.
믿음은, 그저 오늘
명확하지도 않은, 하지만 나를 압박하는
막역한 두려움 대신
오늘 나를 향하신 확실한 사랑을 붙드는 것,
그렇게 오늘 내 마음의 전쟁에
주님을 군대장관으로 모시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