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아신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포로로 끌려갈지.
끌려가지 않을 길을 제시하지만
결국 끌려가게 될 것을 아신다.
그들이 고통당하게 될 것을 아신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오라, 회개하라는
주님의 외침은 이스라엘을 향한 기만인가?
물론 주님은 아신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자기 뜻대로 자연스레 살아가는
오늘의 삶이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결정하게 된다.
더운 여름, 에어컨을 작동하고
이전보다 더운 여름을 자연스레 맞게 되는 것처럼,
정책을 따라 이익을 따져 아이들을 맡기고
매일 매일, 의문하지 않고 내일을 맞이하게 된다.
스마트폰의 수많은 기사와 정보들을 보며
자연스레 시대의 트랜드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성경속 믿음의 사람들을 본다.
보다 나은 선택,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은
상황논리에 불과할 때가 많다.
성경은 완전한 의인, 완벽한 의인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의 백성인가를 선택해야 할 위기의 순간에
요셉은 여호와 앞에 득죄하지 않으려
보니발의 아내의 유혹앞에 옷을 벗어두고 뛰쳐나갔다.
단순한 성적유혹에서의 승리가 아니다.
왕의 조서 앞에서 다니엘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의인일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써,
선택의 기로앞에 나는 누구의 백성인지를 살아가는 것,
그것은 무엇이 가장 현명한 선택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누구의 백성인지를 묻는 질문에 가깝다.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자녀들이 알아서 길을 찾아내야 하는
복잡한 미로게임이 아니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렘13:15)
하나님은 수다쟁이처럼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그의 백성은 마치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것처럼
귀를 막고, 소리지르며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고 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색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표범이 자기 몸의 반점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악한 짓에 익숙한, 익숙해지면
선을 행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선을 행할 수 있다. 주님께 익숙해지면.
익숙해지면. 이라는 단어는 가르침을 받다라는 뜻이다.
스스로 악을 뿌리칠 힘도, 선을 행할 힘도 없다.
악한 짓에 가르침을 받는 대신, 주님께 가르침을 받게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