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지난주에 제가 울었잖아요. 왜 울었는지 알아요?”
“아니, 모르겠는데?”
“말씀을 외웠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거예요. 그래서요.”
“그런데, 오늘 그 말씀을 외웠어요.”
차 안에서 나눈 짧은 대화에 마음이 뭉클했다.
작년까지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아이였다.
여러 에피소드도 많았지만, 아내는 이 아이를 많이 생각했다.
원래 부모님의 동의없이 들어올 수 없는 ㅇㅇ참여에 대해
평소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아내가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믿지 않는 이가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다면
우리가 가진 기존의 방식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고,
이후에 가진 행사에 아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애쓰고, 판을 새로 짰다.
아이들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시간이 필요하기에, 교회에서 기쁨과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게 이유였다.
모임에서도, 점심을 먹으면서도 이 아이에게
성경을 가르치기도 하며 따로 시간을 떼어놓았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시간속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다.
아내는 그 중에 한 명이고,
아이는 옆 집에 사는 신실한 분이
매주일 데리고 오시고, 점심을 챙겨주신다.
이 모든 과정이 지나고 난 후
아이가 자신의 의지로 예수님을 주라 고백했을때
이 모든 시간을 잊어도 괜찮다.
하지만 인생의 긴 선에 우리가 한 점 있었다.
그 한 점을 찍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가 있었던가?
차 안에서 아내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크고 대단한, 혹은 사람들이 주목할만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아시는, 주목하시는 시간을
떠올려본다. 짧은 대화속에 느껴지는 주님의 웃음.
제사장 바스홀이 예언하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형틀에 묶었다.
다음날 형틀에서 예레미야를 풀어줄 때
예레미야가 바스홀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홀이라 부르지 않고
마골밋사빕이라 부르신다.”(렘20:3)
비옥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
주변에 공포를 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의 종교를 책임지는 이가
하나님의 반대자리에 서있다.
나는 두렵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선포가
도리어 하나님의 반대자리에 서있지는 않을까
비록 매맞고, 형틀에 묶여 있어도
주님의 마음안에, 주님의 생명싸개 거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