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마감하며
잠시 책상에 앉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숲속 작은 빌라, 구석에서
나는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나를 찾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모가 되어
마냥 멈춰 있을 수 없어서
겨우 걸어가게 된 것은
주님의 의도라고 자주 생각한다.
그때문에 나는 작년에도, 그리고 올해도
나 스스로의 기질로는 도저히 생각지못할
걸음들을 걷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을 생각한다.
내일의 토론때문에 몇 개의 유튜브를
확인했다. 마음이 어지럽다.
서로가 하나님의 편이라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 편이어야 하는가?
며칠사이 몸살난 몸을 가지고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마음에 애통함이 있다.
가나안을 앞에 둔 여호수아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군대장관,
누구의 편인가를 묻는 여호수아의 마음이 아닌가
사역을 위해 모인 자리지만
사역의 대상자들은 여전히 변방에서
아파하고 있다. 그리고 모인 이유로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그 자신감 속에 나는 부끄러워
할 말을 잃게 된다.
사역자들의 명예때문에 사역지가 있는 것인가?
자신의 정당성을 보일 수 있는 근거가 사역지인가?
여호야김이 왕으로
하나님앞에 자신의 정당성을 보일 수 있는 근거는
백향목을 많이 사용한 궁전에 있지 않다.
대조해서 보여주는 그의 아버지 요시야,
정의와 공의로,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자를 변호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렘22:15-16)
말 그대로 하나님이 왕의 자리에서
바라는 통치가 그의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
신학을 공부한 기억에 감사한 것들이 있다.
충분한 논거와 자료를 가지고도
서로 전혀 다른 반박을 할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조차도 그런 연약함을 품고 있기에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내게 찾아와 주시길 기도한다.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러고보니 이십년도 넘게
되뇌이는 믿음없어 보이는 이 기도는
지금도 여전하다.
지금 이 연약함까지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부분까지
걸어갈게요. 그러면 또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