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할만한데도
왜 회개하지 않을까?
기도할만한데도
왜 기도하지 않을까?
여섯째 나팔 재앙에서
사람의 1/3이 죽음을 맞게 된다.
그 죽음의 순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고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않았다. (계9:20-21)
극도의 희생과 공포.
이 정도면 회개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 서면
회개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 징계와 심판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라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재앙을 다룬 영화만 해도
이 상황들을 예측할 수 있다.
재앙이 벌어졌다고 회개하는 대신
더욱 자신을 지키려 애쓰게 되는 게 인간이다.
이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지옥 같은 세상은
그저 원망의 대상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불공평과 절망은
눈에 보이는 부조리와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치부해버리면
회개할 필요도, 기도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리고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계속하게 된다.
말 그대로 내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구조의 문제로만 결론에 이르게 된다.
기도하지 않으면
말씀을 통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면,
주님의 마음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발견하지 못하면
나는 회개하지 않는 종말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여섯째재앙 #죽음앞에반응 #회개하지않는사람들
#재앙영화 #부조리와구조 #뿐아니라 #나는어떤존재인가
#말씀묵상 #QT #생명의삶 #계시록 #노래하는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