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독특한 책을 만드는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읽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책 자체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으로의 가치를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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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하는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마지막까지 건네지 못한
이 물음은 사실 나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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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하고, 작품을 보며 묻곤 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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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마다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작업에 국한된 질문만은 아닙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들, 반복되는 일상,
짓궂은 사람들과의 만남, 가슴 아픈 사역까지도
의미를 찾지 못한 시간의 층위를
반복해서 쌓아갈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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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품, 하루의 일상에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해도
그 시간들이 모였을 때 만들어지는
의외의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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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레이터(Saul Leiter)는
그저 누군가의 창문을 찍었고
그게 대단한 업적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오랜 시간 동안 자신만의 시선,
예를 들면
화려하고 깨끗한 구두보다
구두를 닦는 남자의 구두에
그는 관심을 가지고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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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반 고흐는
유명하고 화려한 대상이 아니라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과 후미진 소재를
자신의 화폭에 담았습니다.
자신의 관점을 그림 속에 지속적으로
표현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그의 그림에서
대단한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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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들이 걸어간 시간은
사람들에게 예상 못 한 위로를 줍니다.
멋진 그림이나 사진 한 장이 아니라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이어간
그들의 시간 때문에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후광을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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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린 요셉에게
이유나 의미를 찾으면
그는 아무 답도 말할 수 없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에게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간증을 들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후의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벽에 끄적거리거나 침을 흘리며 미친 연기를 하고
모멸을 받거나 매번 힘을 다해 도망합니다.
선지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힌 채 묻습니다.
‘오실 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그의 가치와 곧 죽게 될 자신의 의미를 묻습니다.
오늘의 이유나 의미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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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인가? ‘
‘이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
여전히 습관처럼 의미와 가치를 묻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그때를 생각하면
가끔씩 퍼즐의 조각 몇 개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의미를 찾기는 늘 요원합니다.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다면
의미나 가치를 말할 수 없다면
오늘 우리의 일상은 아무 의미 없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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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답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답을 가진 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답을 알지 못하지만 오늘을 살아갑니다.
답이신 주님께 답을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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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풍경 #1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