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땅에서 내가 받은 은혜 중
하나는 작은 밀알과도 같은 한 영혼이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만난
볼티모어의 작고 초라한 묘.
그 앞에서 떨리는 내 영혼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박에스더로 잘 알려진 김점동은 한국 최초의 여의사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안일을 돕던 광산 김 씨의 딸로 태어나
세례를 받은 후 에스더로 이름을 바꿨다.
볼티모어에서 양의학을 공부한 후 의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여성들의 진맥조차 자유롭 못하던 100여 년 전 여성과
많은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충성하다 결국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여성전용 병원에 부임한 첫 10개월간만 3000여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내가 만난 무덤은
박에스더의 남편 박여선의 묘다.
박여선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박에스더와 결혼한 후
아내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 온 후 자신의 영어가 학업을 수행할 만큼 능숙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자 아내를 뒷바라지 하기위해 농장에서 일하며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댔다.
아내 박에스더가 의사가 되기 16일 전, 결국 박여선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4년 간 이국땅에서 상투머리 한 채 고생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하는 그의 땀방울.
헛되고 쓸모없는 이 작은 충성을 통해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영혼으로 열매 맺으셨다.
그 열매 가운데 내가 서있는 것이다.
며칠 전, 일본인 선교사 소다 가이찌 의 묘를 촬영하러 양화진에 갔다.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으로서 한국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살았던,
평생을 고아들을 품고 살아온 사람이다.
21살부터 방랑생활을 하며 떠돌던 그는 31살 때 대만에서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 때 이름 모를 조선 청년이 그를 불쌍히 여겨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고 회복될 때까지 밥값을 대주었다.
그로 인해 소다 가이찌는 조선에 헌신하게 되었고 결국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한 영혼의 섬김을 통해 시작되었다.
박여선의 묘 앞에서
누렸던 그 감격과 감동을
소다 가이찌의 묘 앞에서 또 한 번 누리게 되었다.
백년이 흘러
이 작은 씨앗이
작은 누룩이 되어 먼 시대를 살고 있는
나의 체질을 바꾸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