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의 배경이 되는 아름다운 마을 ‘하동’
몇 년 만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되었다.
섬진강 기슭 차(茶) 향내 나는 사람들과
쌍계사 주변에 흩날리는 하얀 꽃비에 취했던 것도 같다.
이번 하동촬영에서는 도예의 대가(大家)를 만났다.
때론, 가치를 돈으로 따져 보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집에 수없이 쌓여있던 이 분의 작품 하나가 몇 백만 원을 호가할 정도란다.
내가 보기엔 다 비슷한 모양 같지만,
그가 보고 만드는 모든 것들은 무언가를 초월한 듯 보였다.
자기 자신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그의 집념과 자아성취는 놀랄 만 했다.
당신은 언젠가 땅에 묻히지만 자신의 작품으로 이름을 남기겠다는 꿈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집념과 수고 또한 남달랐다.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여전히 새벽 일찍부터 공부와 연구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요행과 은혜는 다르다.
그가 제자를 향해 퍼붓는 호통은 모두 자기가 살아낸 삶이었다.
하지만 내가 안타까웠던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빈자리였다.
사람은, 누구도 그 빈자리를 완성하지 못한다.
그는 작품으로 그것을 채우려 하지만..
그의 집요한 수고를 보며
내가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작업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
내 작업의 기초는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
가장 작은 누군가를 사진으로 찍어내는 것이
곧 예수님을 찍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매일을 수고했다.
작업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명절도 반납해가며 치열하게 시간을 벌어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의 기초를 쌓아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 같지 않다.
그래서 잠깐 멈춰 쉬고 있는 듯 한 시간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난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충성하고 있는 것이다.
대가(大家)는 자아성취를 위해 살고 있지만
나의 성취는 하나님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내가 무언가를 이루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기쁨은 나의 존재에 있는 것이다.
몇 년간 치열한 작업 속에 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찍고 있는 사진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길 소원했다.
정말 그것을 원하고, 또 원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게 알게 하셨다.
사진이라는 틀 속에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통로가 되는 것.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깨닫게 하셨다.
하동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안.
이번 취재를 함께 한 분을 위해 뒷좌석에 앉아 기도했다.
하나님의 영광이 버스 안에도 가득하기를 바라며..
크고, 화려한, 유명한 것은 하나 없지만
이 땅과, 이 우주의 주인이신 내 아버지가 웃으시면
나도 따라 웃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