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막 14:62
예배중 이 말씀 앞에 나는 눈물을 넘어
꺼이 꺼이 통곡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자신의 문제에 갇혀 살고 있다.
마치 성전미문의 구걸하는 앉은뱅이처럼 무엇을 얻을까 하는 것이다..
저에게 사랑을 주세요.
저를 치료해 주세요.
저를 구제해 주세요.
모두가 어떻게든 애타게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요 7″37-39, 4:14
며칠 전 한 구걸하는 사내를 만났다.
방진관. 이라는 이름의 이 사내를 강남역 어딘가에서 봤다고
누군가 내게 알려왔다.
2년 전, 진관 형을 처음 만났을 때 강남역에서 노숙을 하던 알콜중독자였다.
청년들과 함께 그를 데려다 씻기고 치료하여
함께 예배드리던 중에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했다.
자신을 구원해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날마다
눈물로 예배드리던 형이었다.
하지만 반 년 쯤 지나 형은 다시 술을 먹게 되었다.
알콜중독자였던 형은 다시 나락으로 빠지게 되었고, 몇 번의 반복된 방황기를 거쳤다.
청년들이 모여 사는 사랑방이라는 곳이 있었다.
진관형을 몇 번이고 그 곳에 데려다 놓기도 하고,
그 청년들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 진관형을 데리고 들어와 보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길들여 지지 않은 이 상황속에 도망쳐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지금 사랑방은 없어진 지 몇 달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마땅히 데리고 갈만한 장소도 없게 된 것이다.
진관형은 몇 번의 직장생활을 거쳤지만 앞 날의 근심들에 마음이 무거워져
오늘 일하던 직장을 벗어 버리고 다시 술을 찾았다.
그리고나면 두려웠던 오늘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차려보면 그나마 자리 잡고 있던 오늘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나는 화가 났다.
돌아올 때마다 하나님은 형을 몇 번이고 쉬지 않고 만나주셨는데
늘 작별을 고하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화가 난 것은 진관형을 향해서라기 보다는 인간 근원적인 아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안다.
믿을 수 없거나, 믿지 않는 것이지
하나님의 계심. 그 자체를 부인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기 때문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기에
그러므로 (언제고 이 질문 앞에) 사람들은 핑계하지 못할 것이다. – 롬 1:19-20
새벽에 일어나 무릎 꿇었다.
하나님 어찌해야 합니까.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하는 것이 예수님께 행하는 것인데..
밤사이에 눈까지 내렸습니다.
그 눈물 많은 사내는 이 추위속에 떨고 있을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실 내가 진관 형에게 구체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때는 아니다.
신학에 대한 공부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우선과제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진관 형이 있겠는가.
어쩌면 진관 형은 스스로 길거리로 내몰렸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기관들이 있어서 스스로 조금만 통제해 준다면,
술의 굴레에서 벗어나준다면
먹고 사는 것은 문제 없을텐데
이북땅에 있는 수 많은 영혼들은
목숨을 걸고 수고해도 기아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처절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들의 몫까지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숙제와 같은 영혼에 대한 문제..
진관 형을 만나러 가는 버스안에서도 기도했다.
왜냐하면 솔직히 자신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형을 만나서 이젠 마땅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만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그림. 한 손에 소주병을 들고 턱 하니 앉아 있겠지..
수 없이 반복되던 과정 속에, 결국 자신의 의지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정작 자신이 그 상황 가운데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면
어떤 의미에선 하나님 조차도 진관 형을 도울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나님은 아파하며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것 처럼..
가인이 자신의 동생을 쳐죽일 때 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창4:7
하지만 이 말씀 앞에 귀를 막고, 자신의 동생을 쳐죽였다.
가인은 죄를 다스릴 수 있었지만, 도리어 죄가 가인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우리를 죄가운데 몰아넣어 올무에 빠뜨리려고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진관 형을 만나러 가는 버스안에서도, 그 이전 골방에서 기도드리는 시간에서도
나는 진관형을 피할만한 수많은 변명을 찾았던 것 같다.
하지만,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입니다. -시119:105
내가 그 다음 스텝은 알수도 없고, 먼 걸음은 희미한 안개와도 같지만
적어도 한 스텝씩은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걷겠습니다.
내가 걸어야 할 한 스텝.
강남역에 내려 한참을 배회하다가
결국 가장 따뜻한 지하도 어딘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진관 형을 만났다.
한 손에는 예상대로 소주병을 들고 있었고,
어디서 구해다 입었는지 스키잠바에, 머리는 스타일리쉬하게 짧게 잘랐다.
형은 나를 알아보았고, 혀 꼬인 소리로 나를 불렀다.
역시나 무엇을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따뜻하게 반겨야 할지, 따끔하게 꾸짖어야 할지..
진관 형을 주님의 보좌 가운데 올려드립니다. 를 시작으로 기도를 드렸다.
형은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는 것이 회개는 아니다.
그 울음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다시금 가인을 생각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니 죄는 진관 형을 잡아 먹길 원하나
진관 형은 죄를 다스려야 한다!
내 기도를 따라서 기도하길 말했다.
아버지께 도와주시길 기도했다.
타이르고 꾸짖어가며 ..
하지만,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칠 수는 없었다.
지하도의 주위 모든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할 만큼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어.”
더이상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로 자신이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면 모를까.
스스로 주저앉아 버린 이 자리에서 나는 아무것도 도울 수 없었다.
아.. 내가 이곳으로 오면서 예상했던 모양대로 이 만남은 끝이날 모양인가보다..
“다음에는 맨 정신으로 대화해요. 그래야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진관형을 떠나며 생각해보니
사실, 지금 진관 형이 맨 정신으로 내게 도와달라고 부탁해도 나는 아무것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어디선가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걸려온 H에게서다.
사실 어젯밤에 아내와 함께 기도할 때 많은 동역자를 위해 기도했는데
H를 위해 가장 마지막에 기도한 것이 생각났다.
그저 안부인사겠거니 했는데
H는 지금 자기가 노숙자 관련 쉼터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곳은 숙식은 물론, 예배와 재활 교육까지도 맡고 있단다.
할렐루야!
아. 아버지의 사랑에 몸과 마음이 떨렸다.
이제 반은 해결된 것이다.
나머지 반은 당사자의 몫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지, 저 멀리를 비추시지 않는다.
우리의 때에 맞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처음부터 백 살때, 아내 사라로 부터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언약을 주시면 좋겠지만
아브라함의 한 걸음마다 그 언약을 성취해 나가셨다.
우리 자신이 준비될 때까지 그 분은 기다리신다.
마치, 내가 이제서야 신대원 공부를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그 신실하심을 믿지 못할 때 사람은 악수를 두고,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것이다..
오늘 예배드리는 중,
그 신실하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에 마음을 떨었던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이 시대.
진정한 해갈은 오직 곧 오실 주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막 14:6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