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주가 문밖에/야고보서 5:1-12)
야고보는 부한 자들에게 앞으로 임할 일들을 생각하고
울면서 부르짖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용한 일꾼들에게 지불할 품삯을 주지 않아
품삯은 소리 지르고, 일꾼들은 아우성 쳤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꾼들은 지금과 같지 않아 날마다의 품삯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당장의 먹을 것들이 없음에도 부한 자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공공 건축사업을 후원했지만
자신들의 일꾼은 전혀 돌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부한 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 5:3)
이 천년 전이 말세라 말한다면
지금은 더욱 임박한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돈을 저축한 채, 몇 십 년 뒤에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저축한 것은
불과 몇 십년이 못됩니다.
당장 쌓아둔 쌀이 없어서 오늘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던 할머니와 어머니대의 신앙에 비해
우리의 마음을 살쪄 있습니다. 무뎌 있습니다. (약5:5)
날마다의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는 놀라운 은혜의 응답 가운데 살고 있지만
지난 몇 십년 전과 비교할 때 비교할 수 없을만큼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우리의 입술은 날마다 불평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환경으로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을 게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전 회사를 그만 두게 되어 마음이 무거웠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저와 조금 이야기하다 웃음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처지에 비해 그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낫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불행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하나님으로 부터 얻는 행복과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얻는 행복을 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절대적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고난을 맞을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면 고난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난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고난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실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환난도 즐거워해야 합니다.(롬5:3)
야고보는 말합니다.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약5:9)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제 유다의 사자로서 곧 오실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사람은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다시 바꿔 말하면 우리가 서로 원망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7:2)
마지막으로 성경은
무엇이든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피해 맹세했습니다.
하늘, 땅, 성전등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그런것들은 꼭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 맹세를 남발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기에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개역개정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약5:12)고
되어 있지만 원문은 우리가 생각하는데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그렇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예. 해야할 경우는 예, 아니오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 라고만 하십시오.” (약5:12 /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