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 / 신21:15-23>
#1
하나님은 일부일처를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의 완악함으로 고대근동 지방에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부 다처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장자권입니다.
고대근동 지역에는 장자의 역할은 지대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들 중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자식에게 그 유리한 권을 주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한계를 지으셨습니다. (신21:15-17)
본문에서 미움을 받는 아내를 표현한 단어는
그저 사랑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매우 싫어한다는 의미를 표현합니다.
그런 아내에게서 난 자식 조차 그 아들이 장자라면 그의 특권에 대해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대우할 때
주고받는 사랑에 익숙합니다.
사회학적인 관점에서도 내 가정을 더 잘 이끌 사람에게 장자의 권을 주는 것이 유리해보입니다.
그렇지만 나의 계산보다 하나님의 법이 우선해야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성경은 부모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반항만 하며, 고집에 세어서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 아들은 그 부모가 그 아들을 붙잡아
성문에 이르러 성읍 장로들에게 데려갈 것을 명합니다. (신21:18-19)
부모들이 장로들에게 “우리 아들이 반항만 하고 고집에 세어서 우리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방탕한 데다가 술만 마십니다.” 라고 호소하면
성읍의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 죽입니다.
과연 내가 부모라면 내 자식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내 아이를 이 풍경속에 넣고 그려보지만 참혹해서 더 이상 상상할 수 조차 없습니다.
부모는 이렇게 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부모가 이렇게 할 정도라면 이 아이는 어떤 수준일까요?
너무나 참혹한 풍경이지만 이 최후까지도 아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죄는 전염병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 퍼져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한 사람의 죽음은 온 이스라엘로 두렵게 할 것입니다. (신21:21)
당시 사회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사회적인 위험도 있지만
부모에게의 불순종은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장자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십니다.
그 징계의 강도는 살피면 놀랍고 두렵게 만듭니다.
그 속에서 잔인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는 징계해야 하는 하나님의 눈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3
죄인을 죽여 나무에 매달게 되지만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21:23)
팔레스타인의 무더운 기후는 조기 매장 풍습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무더운 기후 때문에 사체를 오래도록 보존하게 되면 부패하게 되니까요.
또한 유대인들은 사람이 흙으로 왔으니 가능한 빨리 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체는 부정하기에 시체를 만진 자는 하루가 부정했는데
시체가 나무에 계속 매달려 있으면 이처럼 부정하기 때문에
땅에 묻을 경우 부정이 사라지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사람을 극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떠한 죄를 지었기에 나무에 까지 달리게 되었을까?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어떻게 구세주로 오신 분이 나무에 달려 죽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저주와 모욕과 죄짊을 그 분이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