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임신을 했다.
이제 4주 라고 한다.
6주가 되면 아이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단다.
친한 선배는 자기가 엘리사벳(눅 1장)이라도 되는 양
먼 거리를 달려와 복중의 아이를 축복해주었다.
결혼하기 전, 아비의 마음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었다.
참 막연한 기도였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신실하게 응답해주셨다.
짧은 시간동안 하나님은 순서를 밟아가며
당신의 마음을 알게 하셨고.
그리고 이제 나는 진짜 아빠의 심장을 갖게 되었다!
나는 설렌다.
내가 청년의 때에 청년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가장이 되고 아비가 되었을 때는
가정을 가진 이들을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을 누군가에게 어떻게 도전할 수 있겠는가.
피상적인 구호가 아닌, 아버지의 나라를 구할 때 걸어가게 될 그 실제적인 땅을 경험하고 싶다.
그러나 당장,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을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내 모습이 현실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나의 삶이 다른 이들처럼 직장에서
월급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은 돌보면서 정작 가장 가까운 이들을 돌보지 못하면 어떡하지?’
나 혼자선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지 않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아이를 기르는데까지 생각하면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4,5년 전쯤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제 삶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제 아버지 되시기 때문입닏다.
그러나 결혼은 자신이 없습니다.
아내는 이런 제 삶을 이해하고 결혼하더라도
제 자식은 어떻게 하죠? 두렵고 자신 없습니다.”
그 때의 기도는 오늘을 내다보며 드린 기도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때처럼 오늘도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네 아버지이기 때문에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고 고백했었지?
아들아, 잘 들으렴.
나는 네가 가정을 이룰 때, 네 개인의 아버지에서
네 가정의 아버지로, 또한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될 거란다.”
내 삶이 풍성하지 못하다면,
내가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환경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 (약 4:8)
남극과 북극에는 생명체가 많지 않다.
그러나 인대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는 열대우림이 있다.
이유는 태양빛이 이르는 각도 때문이다.
태양빛에 더 많이 노출되면 될수록 그 생명력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아빠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다만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으로 살 것이다.
“주님, 여호수아의 고백처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수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