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사진을 시작하면서부터 나그네처럼 광야의 삶을 살게 되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실제 어떤 분인지 경험하고 더 경험하게 되었다.
특별한 수입이 없이 대부분의 사진 작업들을 자비량으로 해 나가지만 경비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만큼 살아가고 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내 삶에 대해 책임지실 약속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아내 역시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삶 속에서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감사하다.
얼마 전에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각자 기도하던 중에
내게 쌀을 보내주라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쌀을 보내주었는데 한꺼번에 60Kg이나 쌓였다.
성경은 오늘 먹을 양식만 있어도 만족할 줄 알라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많이 주셨나?’하고 묵상하다보니, 하나님께서 주신 보증수표 같은 거라 생각했다.
하나님은 그때 그때 필요한 것을 채우실 뿐만 아니라 언제든 그것을 주시되
후히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제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 풍성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잃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며 고민한 유일한 화두는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였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는 사람을 보고 잘 산다고들 말하지만 정말로 그게 잘 산다는 것의 전부일까?
딱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복사기 속의 복사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들과 다르게 살기에는 세상의 벽이 너무나 높아 보였다.
그 때 즈음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요셉’이라는 내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자랐다.
하나님이 내 구원의 문제에 나 대신 값을 치르신 것과
그 밖의 여러 가지 믿음에 관한 일반적인 진리들을 믿었지만,
그전까지 하나님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 안에 갇혀 지내던 분이셨다.
내 삶에 대한 수고와 진통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전적인 내 몫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내 삶이 바뀌었다.
이사야 40장은 내가 두려워 떨던 이 모든 세계, 열방이 통에 한 방울 물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그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는 순간, 이전의 두려움은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삶의 맛을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 허무하기만 했던 인생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다른 삶을 선택하려는 내게 사람들은 충고했다.
“굶어 죽기 십상인 이 세상에서 쓸데없이 발버둥치지 말고, 남들처럼 그냥 순리에 따라 살아.”
사람들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남들처럼 살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나는 평범한 직장인에 비해 가난했다.
그래서 좋은 차도, 좋은 집도 갖지 못했다.
하지만 가난한 것은 조금 불편할 뿐이었다. 정말 그 뿐이다.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은 나는 더 큰 것을 얻었고 그것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
단지 몇 명의 사람들만이 나의 행복을 이해할지라도 아니,
오직 나 혼자만이 내 삶의 가치를 이해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하는 일이라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입에 단내 날 때까지 쏘다니는 것,
그렇게 쏘다니다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 그게 전부였으니까.
남들 보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스스로 그 삶에 당당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일이라 믿었고,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을 때 하나님은 내게 있어야 할 것들을 채우시는 분이시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신실하신 약속을 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내 아버지셨다.
나는 그 삶에 만족했고 감사했다.
하지만 만일 내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 때도 만족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
내가 좇는 이상을 위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까지 그 방식을 함께 감당해야 한다면
그들도 나처럼 행복해 할 수 있을까?
아내는 나를 사랑하기에 그 삶에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내 아이가 배고파 울고 있을 때 나는 어찌한단 말인가?
그때도 나는 그렇게 삶을 살 수 있을까?
혹시 그럴 수 없을까봐, 그래서 그들 앞에 당당할 수 없을까봐,
나는 사랑하고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두려웠다.
어느 가을, 연변에 촬영을 갔을 때 하나님께 처음 그것을 고백했던 것 같다.
“하나님, 전 이 생활이 전혀 힘들지 않아요.
왜냐하면 당신이 내 아버지 되시기에 나는 이 삶이 너무나 즐겁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내는 제 이런 삶을 동의할지 모르지만,
제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의 배고픔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잖아요.
가진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며 살고 싶은데,
결혼을 하면 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나도 무언가 준비가 되기 전까진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한다는 것이 사치처럼 여겨졌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하나님은 내가 던진 질문에 아주 간단하게 답을 주셨다.
“네가 이 삶이 힘들거나 지치지 않는 것은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라고 그랬지?
그렇다면 네가 결혼했을 때 나는 네 개인의 아버지에서 너의 가정의 아버지가 된단다.”
아! 이 간단한 진실이 내 안의 두려움을 몰아내버렸다.
내가 우리 하나님을 얼마나 작게 여기고 있었던가?
하나님이 내 아버지로서 나를 사랑하시고 지키시는 것과 동일하게
내 가정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것. 그 믿음이 나를 얼마나 자유롭게 했는지 모른다.
내가 주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그 믿음은,
내가 가정을 이루어도 동일한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