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
“명경이 내 아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내 아내가 되었어도
나는 사랑했을 것이다.
물론 양상은 다르겠지만
아내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 사랑 위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부으실테니까..”
결혼을 하고,
식장을 걸어 들어가며 하나님은 내게 그것을 가르치셨다.
지금까지는 여자친구로써 그녀를 사랑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법 안에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만큼 결혼을 통해 남편과 아내가 된다는 것은 중한 일이다.
그것은 마음이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는 동의의 차원을 넘어선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처음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 말씀하셨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었으므로,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19:5-6, 9)
예수님의 이 말에 제자들 조차도 불만을 토로했다.
“남편과 아내 사이가 그러하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시 힐렐 학파의 견해는
아내가 빵을 태우기만 해도 이혼이 가능하며,
심지어 후대의 랍비들은 더 매력적인 여자가 생기면 이혼이 가능하다는
주장 까지 내놓을 정도였다.
로마에서는 문란한 성생활과 간통이 유행이어서
결혼은 동거하기로 합의하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고 한다.
우리 시대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우리는 바리새인이 물었던 이런 질문조차 예수님께 드리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이유는 철저히 자신을 위한 것들이다.
당시의 눈에도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너무나 부당한 것이었다.
제자들조차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고 싶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비록 이혼까지 가지는 않을지라도
내가 가진 기득권을 놓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결혼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아내를 예비하신 것이 아니라
아내를 위해 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비 안에 그 둘을 하나가 되게 하셨다.
나를 위한 아내라 여기면
그 기대만큼이나 큰 실망과 불평이 찾아온다.
나를 위하지 않는 여지가 보일 때
그녀는 더이상 내게 필요치 않는 여자가 되어 버린다.
남편과 아내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나를 위한 그들로 보게 되면 이와 같다.
하지만 나는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내를 위해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내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내가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만 한다.
교회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만큼만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나는 그렇게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