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는 마케도냐의 행정수도이다.
바울이 2차선교여행때 데살로니가에 들렀다가 유대인의 핍박으로 인해 얼마동안 머물지도 못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을 지켰고 예수님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나는 이 배경을 묵상할 때마다 교회의 놀라운 신비를 생각한다.
목회자와 성도의 구분된 역할로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돌보는 목양의 형태가 아니라
복음의 신비로 인해 스스로 생명의 잉태해 나가는 하나님의 자궁과도 같은 교회,
허약해져 가는 현대교회에 어떤 형태의 교회가 옳은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흘러온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부분도 간과할 수 없기에 그저 기도하고 바라볼 뿐이다.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이 주신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벧전1:6)
주님이 주신 분명한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은 크고 놀라워서 이들로 시작된 소문은 마케도니아 지방과 아가야에게 까지 널리 퍼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기쁨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환난은 절망과 슬픔을 발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예수를 믿은지 얼마되지 않은 새신자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기독교는 가학적인 종교인가? 가학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인가?
주님이 주신 기쁨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
내가 가진 수많은 기쁨도 주님이 주신 기쁨을 넘어서지 못하며,
아픔도 주님 주신 기쁨을 넘어서지 못한다.
성경은 다가올 진노가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벧전1:10)
그 진노가 사람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면
진노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 진노에서 구원해 내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벧전1:10)
내가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크기는 어느정도인가?
나보다 조금 키가 크신 분, 조금 더 우월하신 분?
그 분은 우주의 주인이시다.
우주보다 크신 분이 내 안에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