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대구지만,
서해안 여행길을 좋아합니다.
밀물과 썰물이 내게는 언제나 신비롭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내게는 언제나 신비롭습니다.
후배 대훈에게서 몇 년 전부터 얘기를 들어왔지만
1년여 만에, 그것도 짧은 일정으로 서천을 다녀왔습니다.
서천, 마량리 앞 바다는 최초의 성경 전래지로 알려져 있으며,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돌아가신 곳이기도 합니다.
마량리 앞 바다의 어청도 어귀에서
선교사님이 타고 계시던 구마가와마루선은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목포로 가던 중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목포로 가던 중
선박 충돌사고로 배가 파선되었습니다.
당시 같은 배를 타고 있던 보울비(J.F.Bowlby)의
진술을 빌리면, 생존자인 보울비보다 아펜젤러가 탈출하기?좋은 조건이었지만
다른 조선인들을 구하려다 자신의 몸은 미처 돌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연을 가진 어청도,
그곳을 바라보는 언덕에
파선한 배의 모양을 본떠 만든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이 지어졌습니다.
파선한 배의 모양을 본떠 만든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이 지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동 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의 설립자로,
또 성경을 번역하신 선교사님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고국에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분입니다.
대훈의 형인 박대서 목사님이 미국에서 공부하며
모은 각종 신앙 유품 약 500여 점을 기증 받아 이 곳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에 없었던 한국 선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당시 사람들의 관심에 없었던 한국 선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선교의 물꼬를 열어 준 가우처(John F. Goucher) 박사의 유물 외에도
맥클레이 선교사, 스크랜턴 선교사들의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박 목사님이 유품들을 모은 이야기와 기증한 사연들을 대훈에게서 들으며
나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30초 남짓의 셔터, 긴 시간이 흘러 한 장의 사진이 담겼습니다.
한 장의 사진 속에 긴 시간을 담았습니다.
기도와 기도를 담아, 감사함을 담아,
복음 앞에 빚진 마음으로.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