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쓰다가,
말씀을 먼저 묵상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급한 것을 먼저 하다보면
중요한 것은 늘 뒷전이 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스바냐는 요시야왕의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원인은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열거하다가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에게도 맹세하는 자들’을
심판의 목록에 넣습니다.
말감은 어린아이를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행했다고
성경에 기록되는데, 밀곰, 혹은 몰록으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동시에 우상에게도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지인은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너무나 다급할 경우에는 무당을 찾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처럼 명확하지는 않아도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신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돈이라는 우상앞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돈 앞에 기도하지는 않지만
돈에 기대어 마치 신을 대하듯 신앙적 결단을 못내리고 있는 모습도 발견합니다.
선지자는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할것이라 말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요.
다시 표현하면, 기도하지 않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문제들을 현실적인 방법으로 풀어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지금으로 확대해석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을 아주 좁게 해석해 내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면 무리일까요?
마음대로 살게 놔두세요.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땅의 문화는 내 마음을 이리 저리 흔들어 놓습니다.
그저 좋은게 좋은 것 같습니다.
경직되어서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영적 싸움에는 깨어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선을 행하지도 재앙을 내리지도 않으신다’
라고 마음에 말하는 사람을 내가 등불을 켜들고 뒤져서 찾아내 벌하겠다. (습1:12)
내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분이십니까?
그 분을 믿지만, 혹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입니까?
나는 깨어야 합니다.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