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말씀을 묵상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자극적인 영화를 보면
그 잔상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아
간혹 꿈속에서도 그 장면과 대사가 생각나는 것처럼
잠들기 전에 말씀을 묵상하려는 이유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습관이 늘 평안하고 좋은 밤을 약속해 주진 않습니다.
꿈결에 말씀은 자꾸만 내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시선이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밤새 뒤척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가나로 왔을 때
갈릴리인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그 환영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과 기사에 반응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같은 본문에서 갈릴리인과 대조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자식의 병 때문에 가버나움에서 27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가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표적이 아닌 말씀만을 주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요4:50)
이 문장 앞에서 믿고 자신의 길로 돌아간 왕의 신하는
이 문장 앞에서 믿고 자신의 길로 돌아간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경험은 가족의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갈릴리인과 왕의 신하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주님을 바라보았지만,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는
왕의 신하를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는
왕의 신하를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내게
주님은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 앞에 반응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