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간 고민한 것 하나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사람들과 상황을 통해, 또는 여러 기도를 통해
당신의 뜻을 나누어 주시지만,
실제로 그 일의 성취를 보는 것은 드물다는 것이다.
수많은 방해요소와 장애물들을 보며,
현실의 벽이 높기 때문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현실의 벽이 높기 때문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주님은 방해요소들보다 약하신 분이신가?
동료들과 그것을 두고 기도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더 나아가지 않게 하시되,
그게 아니라면 나는 과정뿐 아니라 최종적인 결과도 보고 싶습니다.
그 결과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보고 ‘우리 주님이 이렇게 아름답게 일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셨다.
가나안 땅을 밟기도 전에,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미 주셨음을 말씀하셨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땅을 정복한 것은 불완전해 보인다.
하나님은 주셨는데, 사람들이 가진 것은 부분적이다.
우리의 현실과 너무 맞닿아 있다.
하지만 갈렙이 속한 유다가 정복한 땅은
다른 모든 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복하기 매우 어려운 땅이었다.
갈렙의 나이가 85세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경은 그 성읍을 크고 견고하며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14:11-15)
하지만, 이 노인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다. 라고 말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된다.
성경은 그 땅을 차지한 이유를 힘이 강하거나, 적군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수14:14)
이렇게 가장 정복하기 힘든 지역을 정복했음에도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은 가나안을 부분적으로 정복했다.
그들은 정복해서 없애버리느니 노예로 삼아 수익을 얻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삿1:28)
가나안의 전쟁 방식을 답습하므로
도리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이 되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었다기보다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인간의 불신앙때문에 실패하게 되었다.
적어도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그들이 승리한 이유는 예배와 순종의 방법이었다.
나는 그것을 기도했다.
우릴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 과정 중에 있는 우리가 주님 앞에 잘 준비되어 서길 원합니다.
절망하고 낙심해 있는 우리 앞에
주님이 말씀의 검을 휘두르시자
보이지 않는 말씀의 검은
보이는 어둡고 답답한 현실들을 쪼개어 놓았다.
흔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길은
막힘없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 평탄한 대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드문드문 발 디딜 곳이 놓여있어서 걷기에 불안해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길은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어서
믿음의 도약(跳躍)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두려움을 뛰어넘을 도약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