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유보하는 이유

르호보암은 지혜자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동년배들의 말에 반응하여 포악한 말로 백성을 대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게 된다.
분열된 왕국의 책임이 르호보암에게 있는 것 같지만
성경은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는 않는다.
르호보암이 잘못했지만
여로보암과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에게
‘반역했다’라고 말하며 그 책임을 묻는다. (대하10:19)
 
또한 성경은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나라가 분열한 
근거를 보다 앞선 사건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솔로몬은 말년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 (왕상11:4)
결국 솔로몬 시애의 우상숭배의 죄에 대한 심판이
그 배후에 있었다.
 
이런 성경적 근거 때문에
어제도, 그리고 자주, 사람들과의 대화가운데
상황을 명확하게 판단하는 것을 미루게 된다.
내가 파악하고 있는 생각과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인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눈물을 흘렸다.
가깝게 지내던 분이 암으로 투병하시다 오늘 돌아가셨다.
당시에 대부분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낼때
이 분은 항상 두 아이를 손잡고 다니셨는데
그때 아기학교며, 교회도서관을 함께 다니던 분이었다.
따로 이야기할 기회들이 있었는데
이 분이 품은 꿈, 소원들이 생각난다.
 
오늘, 이 장면만을 바라보면
모든 게 허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믿음,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오랫동안 아파하셨는데
이제는 주님품에 평안히 쉴 수 있으리라.
그래서 남은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 빈자리에 주님이 위로해주시기를.
르호보암이 간과한 백성을 향한 긍휼..

사람의 걸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계속 같은 묵상이다.
사람은 어떻게 바뀌는가?
결국 어떻게 호흡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걸음이 만들어진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다.
스바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는
이들이 복되고 복되다고 말한다. (대하9:7)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지혜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거나
질문에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과 삶은 차이가 있다.
다윗과 세례요한, 모세와 요셉, 다니엘
이들이 솔로몬과 만들어내는 경계는
어디서 길러낸 지혜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마음을
나는 어디서 길러내야 하는가?
나는 나를 믿지 말아야 한다.
내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

긴 시간, 건축해야 할 곳

솔로몬은 자신의 애굽 아내를 
여호와의 궤가 있는 거룩한 곳에
살지 않게 했다.(대하8:11)
아내가 애굽의 바로의 딸이라는 사실을 
문제삼지 않는다.
성경도 문제 삼지 않는 이유는
당시 역대기를 읽는 독자의 상황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웃사의 죽음을 상기했을때에도
솔로몬의 행동은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솔로몬은 이 방식으로
하나님과 아슬한 줄타기 관계를 
만들어온 것은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종교적인 공적을 쌓아간다.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서의 부와 안전을 지켜나간다.
애굽에서 군마를 사들인다던지, 이방의 여인들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로 인해 견고한 방패와 부강함을 만들어나간다.

믿음좋고 신앙생활 잘하는 기업의 대표 장로님과 같은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후에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안정감으로 
점점 하나님과 멀어진다.
이것이 두렵다.
안전감을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은 그 안전감을 허락하시지만
동시에 그 안전감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솔로몬은 20년동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을 지었다. (대하8:1)
2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긴 시간동안 솔로몬이 힘써야 할 건축은
무엇이었을까?

마음과 행동의 변화

솔로몬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했다.
그 내용은 너무나 단순하다.
하나님께 나아오면, 하나님을 버리면.
버리지만 또 하나님께 나아오면.

단순하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한다면
사람들은 결코 실수하거나 불순종하지 않을까?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 것을 경험했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다.
경험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늦은 밤, 아이들과 함께 기도했다.
아이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할로윈 축제의 여러 재미난 것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 가족이 하나님만 믿게 해주세요.”
할로윈 축제라 불리는 것은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다.
이것은 할로윈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축제를 핑계삼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쾌를 즐기려 한다.

쾌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 거하는 쾌는
지금의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문화에 비해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이 문제이다.
설탕의 입맛이 익숙하게 되면
풍성한 음식을 밋밋하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일까?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 죄를 사하고 땅을 고칠지라.

아멘.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기도한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솔로몬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네 자손도 내 율법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가질 수 있는 한계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설 수 없는 연약함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그의 이어진 기도에서
회개와 용서를 말한다.
이것은 주님의 긍휼하심, 그 분의 성품에 
기대는 기도다.

다이아몬드는 한 부분만이
다이아몬드라고 말할 수 없다.
각 면을 따라 빛나는 색과 면이 달라서
여러 면을 합해야 다이아몬드를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솔로몬은 놀라운 표현으로 그를 말한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다 모실 수 없습니다.” (대하6:18)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내 안에,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오셨다.

주님은 내게 당신의 약속을 말씀하시고
약속 위에 설 수 없는 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으로
나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내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매 순간  주님의 신비앞에서의 반응이다.

택하고, 택하지 않고

하나님은 다윗을 특별히 선택했다.
예루살렘을 택하고, 또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다. (대하6:6)
2개의 구절에서 택하지 않고 / 택하여. 라는 말을
네 번이나 언급하며 주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다윗을 택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특별한 다윗에게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특별하게 택하시고 사용하신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이 우주의 전부이지 않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식하며
내가 살고 있는 시간과 세계를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저 한때를 살아가는 존재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맡기셨고
완성하셨다.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는 것, 사람들 앞에 유명해지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나는 그 일을 준비하고 다음 사람이 그 일을 이루는 것도 성공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과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성공이다.
 
기억해야 한다.
다윗에게 성전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다윗을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지만
솔로몬이 다윗보다 하나님앞에 쓰임받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주님은 나를 최고로 사랑하신다.

사람의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셀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겼던 이들이
어떻게 주님 앞에 급속도로 부정해질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지혜로운 이보다 더 지혜롭다는 솔로몬은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

언약궤를 지성소에 옮겼다.

솔로몬왕과 모든 이스라엘 회중은 그 앞에서 
셀 수 없을 만큼의 양과 소를 드렸다.
성경은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셀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상징되는
구름으로 인해 제사장들은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대하5:14)
하나님의 영광을 
배우거나 듣는 것이 아닌
직접 목도한 이들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는 것을 정말로 알기 위해서는
경험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윗과 솔로몬의 극명한 차이를 어디서 발견해야 할까?
광야.

나는 광야에서 이 차이를 말한다.

오늘 내가 광야 같은 시간을 보낸다면
이 관점에서,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를 낮추시고 낮추셔서 비로소 내가 믿지 못할 사람이며
오직 주님만을 바라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지혜로운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신 주님을 바라야 한다.

밤사이 캘린더 글을 마무리했다. 다행. 감사.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바쁜 하루.
피곤하지만 매 시간, 감사하겠습니다.

주님 사랑해요.

다시 네팔로

네팔에 간다. 
강진이후 4년만인가보다.
네팔은 비슷한 주기로 벌써 세번째다.

이번에도, 내가 의도하거나 계획한 걸음이 아니다.
주님이 만나게 하실 풍경, 일들,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무엇보다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벌써 내 마음에 생겨난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아이들을 사랑한다.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은 존재들,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룬다는 비밀이 이런 것을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마음.

나는 수고하고 헌신한다 하지만
그 부재의 시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결혼에 대해 망설였던 이유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생각한다.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돌보신다는 약속.
그렇다면. 그 약속을 내가 믿기 위해서는
내가 주님안에 거해야만 한다.
주님 주님..

주님을 알아가다 보니
이 시대의 특수성이 있다.
주님을 알아고자 하는 열심도 필요하지만
주님께 집중하길 방해하는 요소를 배제하는 훈련,
곧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필요치 않을 것을 
툭.툭. 쳐내면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삶을 간소화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해의 폭이 좁아서는 안된다.
그 이해의 폭으로 사람을, 문화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쉽고도 어렵고
단순하고도 복잡하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사람들은 오감을 통해 
지각하고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오감중에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시각적인 정보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들은 믿게 된다.
그리고 모더니즘을 지나며 이성으로 당위성을 
따질 수 있는 것만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과학조차도 진보하며
기존 고전 물리학등,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가게 되면
결국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몇 가지로 수렴된다.
돈과 명예와 여러 욕심들.
 
하나님은 누구신가?
물론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시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 시편 저자가 찬양하는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지으시고, 시간과 세계를 
당신의 뜻대로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시104:19-35)
바다의 힘, 해와 달, 바다 저편과 수면 아래.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마찬가지로 나의 머릿수를 아신다.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
나는 늘 불의한 자입니다.
주님 용서해주세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지,
주님이 세계 가운데 어떤 분인지 
고백하지만
한편에서는 내 삶의 작은 구석
주먹에 쥔 콩 몇 알을 움켜쥐고 있을때가 많습니다.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입술로 고백하지만 내 손은 여전히 억척스럽게 힘을 쥐고 있습니다.
주님, 그래서 더욱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나조차 나를 알지 못하고
나조차 나를 어찌하지 못하지만
주님, 내가 주님안에서 어린아이가 되겠습니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104:33)

피곤한 밤,

탈북 대안학교 인 여명학교 졸업사진을 찍고
잠깐 병원에 들러 영양주사를 맞고
늦은 밤 코스타 모임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파김치.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그리고 다음주에는 네팔로 떠난다.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주님이 아시오니..
주님이 아신다.

그렇다면
나는 아시는 주님 앞에 반응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아가면
당장 잘 되는 것 같아 보여도
영원의 시간 앞에 나는 눈물 흘릴줄 모른다.

 

주님이 내게 물으시는 것마다
나는 부끄러워 할지 모른다.
나는 어디에 저울을 기울이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 당장의 이익과 손해를
순종과 불순종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연습되지 않으면 내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