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중에 성전을 준비하는 다윗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스스로도 꿈이 없다고 말하는  세대.
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놀랍기만 하다.
 
방배동에 축구공을 들고 학교 오는 아이는
너뿐이라며 선생님이 포기했던 아이는
시간이 흘러 미국 ACT 상위 1% 이내의 성적을 얻게 되었다.
또 한 명은 스스로 꿈이 없다고 말했는데
하루 아침에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끼던 장난감을 소명이에게 물려주라고 말했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꿈을 갖고 자라나는 일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
다윗은 자신의 때에 성전을 짖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 솔로몬의 때에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다.
여유가 있어서 그 일을 한 것만이 아니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대상22:14)
금 10만 달란트, 은 100만 달란트 .. 그 밖에 수많은
재료들을 준비했다.
왜냐하면 다윗은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으며,
주님께 기름부음 받았다는 사실은
오직 은혜였다는 사실,
 
은혜는 가질 수 없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이다.
그래서 다윗은 선물을 주신 분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서 힘껏 감사를 표한다.
 
결국 성전은 솔로몬에 의해 지어지지만,
다윗이 지은 것과 같다.
아이들이, 다음 세대가 이룰 하나님의 나라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 할 수 있을까
어느새 40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인생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다윗이 광야에서 주님께 물었던 것 처럼
나 또한 두렵기도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주님께 기대는 것이다.

사랑과 공의의 교차점

오후에 잠시 틈을 내어 말씀을 묵상했다.
요즘은 정말 새벽부터 밤까지 정신이 없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함께 바쁘다. 
숨쉬듯 호흡하며 기도하기를 더욱 힘쓰고 있다.
 
다윗은 왕으로 통치하고 있을 때
두 가지 실수를 범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백성들에 대한 인구조사다.
요압의 보고를 비추어, 다윗은 군사로 동원할
사람들을 계수하라고 지시한 듯 하다.
 
이 본문을 통해 다윗은 관념적인 회개에서
바짝 엎드린 회개의 변화를 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친밀하다고 느끼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그 분의 정의앞에
우리는 숨조차 쉴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에게는 긍휼이 있다.
다윗은 여전히 주님의 긍휼에 기대어 회개한다.
 
놀라운 사실은
다윗의 범죄를 통해 
단 몇 시간만에 7만 명이 전염병으로 쓰러졌다.
지금처럼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시대에
이렇게 사람들이 쓰러졌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사람들은 알게 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범죄함으로 가져다 주는 파급력을 보라.

이 진노가 멈춘 곳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사무엘하에서는 아라우나라고 표현한
이곳에서 다윗은 대가지불은 하고 이 땅을 구입하고
이곳에서 제사드린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가 멈춘 이곳에
여호와의 성전이 자리하게 된다.
인간의 범죄와 주님의 긍휼이 만나는 곳이다.
더더구나 이곳은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에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던 곳이다.
이 곳은 주님의 언약, 주님이 앞으로 이루실 일들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곳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 곳은 주님이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신 곳이 된다.
 
그리고 내 마음에
주님이 찾아와 주셨다.
그리고 날마다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경험한다.

큰 자들과의 싸움

도저히 넘지 못할 큰 산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과연 넘을 수 있을까?
그 산 앞에 모두가 두려워 떨었다.
그때 작은 소년이 등장했다.
큰 산은 골리앗이었고 작은 소년은 다윗이었다.
다윗은 보기좋게 골리앗을 넘어뜨렸고
이스라엘은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다윗은 왕이 되었다.
여전히 넘어서기 힘든 산들이 있었다.
골리앗의 아우를 포함한 큰 자들..
하지만 성경기자는 단 몇절로(대상20:4-8)
큰 산들이 우루루 너어지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과 약속과 때가 있다.
하나님께는 전쟁의 승리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승리가 어려운 때는
우리의 두려움도 한 몫 하지만 
주님의 의도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인생에 광야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판교에서 마커스 콘서트가 열렸다.
나는 이 행사에 기록을 맡았다.
아침 일찍부터 바쁜 스케줄이었는데
기운이 다 소진되어 집에 돌아왔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교회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시대에
찬양이 울려퍼지는 판교의 중심지에서
나는 주님의 영광을 생각했고
사진을 찍으며 기도했고
집회가 마치고 기다렸다는듯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
 
오늘도 이렇게 살았습니다.
라고. 이제 오늘을 안식할 수 있으려나..

요압만이 행동할 수 있다

요압을 통해 인생을 생각한다.
신앙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다윗에게
요압은 늘 불편한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돕는 자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여러 모반을 일삼은 자였다.
통일 이스라엘을 꿈꾸었던 시간에
요압은 자신의 개인적 복수를 단행함으로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요압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연설한다.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상19:13)

암몬과 아람의 연합군 앞에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의 일부, 단적인 모습을 
그 사람의 전부인것처럼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 장면에서 요압은 다윗의 가시같은 존재가 아니다.
다윗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그가 어떻게 변해갈지, 또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순간 요압만이 할 수 있는 선언과 행동앞에
박수를 보내야만 한다.
어떤 선입견도 내려 놓은채..

회개는 행동

바쁘지만, 놓치지 않으려 하는 시간이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다.
나를 잡아 끌지 않지만 중요한
것들에 내 마음과 시간을 묵어야 한다.
 
암몬의 왕 나하스가 죽게 되었다.
다윗은 주변국을 정벌했지만
유일하게 암몬과 다투지 않았다.
나하스와의 좋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하스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하눈의 시대에
다윗과 갈등이 생기게 된다.
 
다윗의 호의에 대해 하눈은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다음 단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하눈은 잘못을 잘못으로 덮었다.
 
기도를 하며
내 안에 수많은 회개의 목록들이 있다.
다시 잘못을 토설하고, 주님께 나아가고
울고, 다시 우는 것의 반복이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선을 긋고, 방향을 다잡고 행동해야 한다.
 
진리를 찾고 찾고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걷는 것이다. 예수님은 빛이기 때문이며,
그 분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나의 주인은 누구신가

누구에게나 주님이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다.
돈과 명예와 멋진 디자인과 선망의 대상과 의지할 무언가.
바울도 자신의 주님을 믿고 있었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열심을 내서 자신의 주님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대적하고 핍박했다.
 
하지만 그는 정보의 빛보다
밝은 빛 앞에서 질문해야 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행26:15)
정오의 빛은 가장 밝은 빛이지만
그 빛 보다 더 밝은 빛이 비추었을때
그는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세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생각하지도 못했다.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가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바뀌게 되었다.
삶의 방식과 방향과 자신안의 믿으믜 구조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새롭게 방향을 설정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탄 배의
방향을 설정하셨다.
“이제 너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
그들이 죄 용서를 받고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할 것이다.” (행26:18)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저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앞으로의 역할을 
말하는데, 이 한 절속에 수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
눈을 떠서 제대로 된 진리를 알게 할 것이며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죄사함을 받고, 거룩함을 입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이 약속.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이전의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에 가깝다.
바울의 3번에 걸친 신앙고백속에
변화가 있다.
누가는 무엇을 강조하려는 것일까?
이 고민을 위해서는 먼저 
성경은 그림에 가깝다는 말을 이해해야만 한다.
 
 

딱히 죄목이 없다

바울은 아그립바왕과 소문 많은 여인 버니게 앞에
서게 되었다.
지금은 재판이 아니라 비공식접견이다.
 
베스도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을 이제 로마황제에게 보내야 하는데
그에 대한 공식적인 죄목 하나 없기 때문이다. (행25:27)
 
여기에 답이 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많은 사람들과 대제사장을 포함한 
유대인 무리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유대법으로도 로마법으로도
딱히 죄목 하나 달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는 단지 베스도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것.
그 한 가지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
때문에 받게 되는 불이익, 고난, 수모..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다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는다.
 
예수님으로 인한 불이익은
수치가 아니다.

살아간 것을 말하라

벌써 2년이 지났다.
바울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갇혀 지내고 있다.
풀려나가기만 하면 자유일까?
그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유대인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새로운 지도자가 왔지만
그또한 이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위의 문제들도 그대로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축 내는 것 같아 보이지만
분명 기점이 있고, 변화가 있다.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다. (행25:11)
적법할 수 있지만
억울하다고 누구나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을것이란 사실은 상식적이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죽기를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행25:11)
사람에게 죽음이 가장 두렵지만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죽음보다 크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로마로 갈 것을
말씀하셨다.
 
바울은 자신의 말에 대한
상당한 대가지불이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스도인. 자신의 말에 대한
대가지불이 필요하다.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3주간 코스타 강의를 간다.
그곳은 항상 주눅이 드는 곳이다.
쟁쟁한 강사들이 청년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고 귀를 기울인다.
그곳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내가 아닌 멋진 말이 필요하지 않는다.
나는 책임질 수 있는 
여전히 함께 하시는 주님이어야 한다.

바울과 벨릭스의 2년

바울은 2년간 감옥에 갇혔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계획이 있지만
자신의 게으름이나 부족함과 상관없이
상황에 눌려서 그는 2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에게 이 시간은 과정이다.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참기 힘든 시간이다.

벨릭스에게 잘 보이는 방법이 있었다.
그는 계산에 능한 사람이다.
노예출신이었지만 귀족의 딸을 취할만큼
계산적인 사람이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무죄였던 그는 충분히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몸의 자유를 얻는 대신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 여전히
신앙 양심앞에 반응했다.

사람에게는 여러 마음이 있다.
그리고 크게는 두 마음이 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
그렇지 않은 마음은 돈으로 집중된다.

돈은 권세가 있어서
우리의 삶을 바꾼다.
당장 우리 취향을 반영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디자인과
조금 더 쾌적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악과는 정확하게 연결되지 않지만
취향을 보다 개선시킬 수 있다는데서
외면하기 힘든 욕구이나 권위이다.

물론, 돈 자체가 죄는 아니며
그 자체가 악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울은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
두려웠지만 그는 두려움보다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과
바울이 가져올 뇌물을 기대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다만 당장 촉각적이고 필요한
유익에 내 손을 가져다 대기 때문이다.
마치 팥죽을 탐내는 에서의 마음과 같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명을 하고
나도 변명이 있다.
삶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과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할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의 순간에 단순해야 하며
조롱받을 위기를 감당해야만 한다.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낄 것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행24:16)
 
바울은 변호사 더둘로와 대제사장 앞에서
그리고 총독 앞에서 자기를 변호한다.
나를 고발할 자격이 있는 자들은
이곳에 없다. 그리고 나는 양심을 따라
행하고 있다.
 
양심을 따라 행한다는 말은
죄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한결같이 변하지 않아야 하며
끊임없이 변해야만 한다.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마음이며
변해야 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따라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고
또 재판이 연기가 되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며
복음을 이야기한다.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