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결과가 대단하지도 않고
어려움까지 당하고
더욱 궁지에 까지 몰리게 되었다.
 
마게도냐 환상으로
내 계획을 내려 놓았지만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났고
귀신 들린 여종을 자유케 한 뒤
무리들에게 핍박 당했다. (행16:19-40)
 
제대로 되는 일 하나 없다.
그런데, 진리 위에 서지 않으면
진리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한다.
과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우리는 인생을 잘못 알고 있는게 아닐까?
다 잘 되어야 하는데,
SNS 상의 사진과 이야기를 보면
다들 잘 되는 것 같은데
나만 이런거 아닌가?
 
그제 강의중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공감한 게 이런 내용이다.
‘아. 나만 문제가 있는게 아니구나.’
우리 인생에 문제는 가득하다.
하지만 문제 가득한 감옥에서도
주님은 나와 함께 계셔서
그 곳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한다. (행16:25)
그리고 그 기도와 찬송을
죄수들이 들었다.
 
큰 지진이 났다.
모두가 도망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대로였다.
이들에게 감옥안이나 감옥바깥이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가 가장 역설적인 것은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였기에
감옥에서 가장 합법적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감옥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부러 고통 당할 필요는 없겠지만
고통 당하는 그곳에도
주님은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주 예수 계신 곳이 하늘나라다.

빌립보에서의 대가지불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해
자신의 기존 계획을 접고 빌립보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이 만난 이는 루디아라는 옷감장수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여는 열쇠는 
한 사람이라 믿는다.
그 한 사람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빚어가신다.
 
한국교회가 이 코드를 
읽지 못하면 수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물량공세에게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귀신들린 여종이 하나 있다.
그는 주인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 준다.
그는 바울과 일행들에게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쳤다.
옳은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옳은 이야기, 그리고 우리에게 유리한
메세지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했을때
귀신이 그 아이에게서 나갔다.
그리고 주인은 큰 돈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적 해방을 맞게 되었다.
기억해야한다.
신자본주의 시대에 참 자유가 무엇인가?
돈이 많은 것이 자유라고 말하는 시대에
돈을 잃더라도 우리 안에 참 빛이 임하는 것,
그래서 어두움이 떠나가는 것
그로 인한 대가지불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이 자유하지만

바울의 선교는 원칙이 있었다.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그리고 그들에게 배척을 당한 후
이방인에게 향한다.
그는 디모데와 함께 선교하기를 원했다.
디모데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은 모계 혈통을 따른다)
그리스 사람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할례를 하지 않았다.
 
 
구원의 자격과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그는 전도 대상자를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다.
모든 것에 자유하지만, 모든 자에게 종이 되려는 것이다.
 
 
디모데에게 행했던 바울은
그리스인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구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에게도 이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디모데와 함께 선교를 떠났다.
하지만 성령은 그들의 행로를 막으셨고
결국 밤에 환상으로 유럽 지역으로 갈 것을 말씀하셨다.
나는 다시 디모데를 주목한다.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바울이 죽고 난 뒤 초대교회를 이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디모데에게 이런 시간들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선교. 그 자체가 목적인가?
세를 불리는 것 자체가 목적인가?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렇게 순종해 가는 것.
외부적으로 크고 대단한 사역을 할 수 있지만
도르가처럼 주변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사역일 수 있다.
내부적으로 그는 끊임없이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죄인중에 괴수,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 용서.. 같은
가치들이 자신의 안에서 먼저 생수가 되어 넘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선택이 옳은가?

갈등과 반목은 분명히 부끄러울 수 있다.
위안이 되는 것은 이조차 하나님 안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야곱과 그의 두 아내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그들 가운데 태어난 아들들.
한 가정안에 시기와 질투가 가득했고
문제의 당사자였던 야곱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갈등을 통해 이스라엘 12지파가 만들어졌다.
 
바울은 마가의 일로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었고 (행15:37-39)
이 일 자체를 성경은 전혀 미화하려 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을 신화적 인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복음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서로의 관점을 중심으로 옳고 그름이 대결하면
심각한 파열음을 내며 갈라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서로 나뉘어 선교를 떠났다.
바울은 바나바 대신 실라와 선교를 떠났고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중심으로 성경을 기록한다.
하지만 바나바는 지난 실수에도 불구하고
다시 마가를 품어 주게 됨으로 다시 기회를 준다.
성경이 이들의 시간을 다 기록하지는 않지만
후에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성경에서
마가 요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그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 말한다. (딤후4:11)
 
사람은 어김없이 변하지만
그 변화는 마가 뿐 아니라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걸린다.
이 시간을 기다려 주어야 하는가?
동시에 기다리는 동안 소모해야 하는 시간도 있다.
그 시간에 함께 있는 자의 시간은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동시에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달려간 자의 시간 또한 가치있다.
 
누가 누구보다 낫다는 판단은
결국 자기 기준과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갈라서 보이더라도 여전히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시간이 더해지면 주님앞에 섰을 때 어느 지점에 서있는가?
내 마음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본질과 비본질,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나는 자주 본질과 비본질을 나누어 생각한다.
이것은 본질, 그렇지 않은 것은 비본질.
우리가 본질이라 믿고 있는 것들중에
그렇지 않은 것들은 생각보다 많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지금의 예배의 순서와 형태는 은혜롭지만
그렇다고 다른 형태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리고 종교개혁을 거치고,
영미권 선교의 흐름에 따라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전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어쨋든, 생각은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삶에서 적용할 때는 그렇게 단순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적용할 때는 차라리 본질과 비본질 보다는
상대방이 시험에 들지 않는 수준을
맞추는게 좋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 (행15:28)
이 말은 너희는 유대인이 될 필요는 없다는 말과 같다.
구원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구원과 관계있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할례를 받았다.
 
이 지점이 기억해야 할 점이다.
구원에 속한 문제가 아니기에
모든 것이 비본질적인 것이고
그래서 의미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비슷한 이유로 야고보를 포함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 중 한가지가 앞서 이야기했던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명했다.
이는 당시 이교도 제사와 관계 되지 않음으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함과 동시에
기존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전에 우리가 행하는 습관과 전혀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닌 점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자유로울 수 있지만
스스로 자유를 누리지 않을 지점은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도 이같이 하라.
무엇이 옳고 그런가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쫓으며 살아야 한다.

전에 멀리 있던 우리를

사울에게 다메섹의 회심과 같은
주님과의 극적 만남이 아니었으면
그또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이방인에게 할례와 모세율법을 지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말은 할례와 모세율법을 지켜온
1500여년간의 그들의 역사의 무게를
생각해야만 한다.
하지만 복음 앞에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을
분명하게 묻고 다시 서는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얼마전 안동에서 만난 이상동 장로의 이야기.
그는 자신의 아들이 가져온
성경을 읽고 복음 앞에서 자신을 새롭게 만들었다.
종들에게도, 자신의 옛습관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쉽지 않지만, 복음앞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오랜 혈통의 문제는
신분과 높고 낮음, 남자와 여자. 수많은 문제들이
새롭게 정의되었다.
 
사람의 인식은 당대 문화를 뛰어넘기 힘들다.
오랜시간 젖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행15:8-9)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말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 그것으로
우리는 주 예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증언할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신 것보다 크신 증거가 무엇인가?
 
성령님이 계신 그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우리를 가깝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왜 우리를 택하셨는지?
과연 이런 나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실지에 대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에 멀리 있었던 나를 부르셨고
내 안에 거하심으로 이제 나를 깨끗게 하셨다.
곧 나를 사랑하셨고, 사랑하시며, 사랑하실거라는 사실이다.

이 믿음에 머물라

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 삶에 능력있고
사는 것을 말하는데
주님은 기름부으신다고 믿는다.
 
많은 이들이 말을 하지만
그 말은 진실이지만
사는 삶이 없으면
그들의 말이 허공을 떠돈다.
말을 줄이고 살아야 한다. 복음을.
이 믿음에 머물러 살아가야 한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고
다윗은 광야에서 고백하고 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도시 밖으로 끌어냈다.
하지만 바울은 일어나서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간다. (행14:19-20)
그의 무엇이 생명보다 나은가?
그의 생명보다 주 예수의 복음.
 
그는 아마도 피투성이로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한다. (행14:22)
 
죽을만큼 돌로 쳤지만
돌로 친 곳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
그리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제자들은 그의 말을 따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더욱 믿음에 머물러 있기를 힘쓰는 풍경..
주님으로 살아가는 풍경..

보이지 않는 싸움

1. 사람들은 눈 앞에 기적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한다.
이고니온에서 표적과 기사가 있었다.
하나님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있게함으로
은혜의 말씀을 확증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갈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보지 못하지만 믿는 사람이 있고
보았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 광야 속에서 그것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고통하는 시기에
과연 주님은 침묵하고 계셨는가?
끊임없이 선지자와 예언자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보이지 않지만, 하지만 보는 것보다 더 가득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길 원합니다.
 
2. 짧은 문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이동한다. (행14:1-18)
이동할 때 키워드는 복음과 핍박이다.
핍박이 있어서 그들은 피했지만
동시에 피한 곳에서 다시 복음 전도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거리를 두고 읽는 이유는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박해현장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예수님을 전한다고 해서
돌로 치려 하는 무리는 없다.
다만 신자본주의 시대의 물결 앞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돌로 치려 하는 대신
모두 생계에만 몰두한다.
 
당연하고 상식적은 이야기지만
믿음은 어떤 영역인가 생각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각각에게 다르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사단의 세력은 이 시대의 흐름에 대해
아주 흡족해 하고 있지는 않을까?
며칠전 수련회에서 사진으로 강의를 풀어 나갈 때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돈과 명예와 좋은 대학과.. 이렇게 모두가
몰두하는 가치 이외에도
주님이 주목하고 있는 가치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가치가 맘몬 아래에 눌려져 있다.
스며드는 세력들, 위협들, 믿음과의 싸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있어야 한다.

마음에 합한 자

이제 바울이 전면에 나섰다.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의 변화는 급박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변화라기 보다는 깨달음에 가깝다.
왜냐하면 오랜동안 사람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생각과 습관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다.
 
바나바의 도움을 받았고
그의 요청으로 안디옥에서 사역해왔던 그들이
이제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고
그 사역의 변화를 누가는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변화
아이들의 변화
공동체의 사람들..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이들의 변화는
말 그대로 시간이 필요하며 
품고 기다려 줄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의 신앙이 완고한
철저한 자기 논리로 무장한 사람과
며칠전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그러다가 내가 뒤로 물러섰다.
싸움은 끝이 날 것 같지 않았고
만약 내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논리나 이야기에서 졌을 뿐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 변화되길 바란다면
차라리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바울의 설교 중
다윗을 소개하는 문장으로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다윗을 보고 기뻤던 하나님.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게 하기 위해
기름을 붓는다.
하지만 그 당시 다윗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는 그저 아무것도 내세울게 없는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던 막내였다.
그랬던 그를 어떻게 주님은 주목하셨는가?
 
양을 치던 어린 목동.
그의 시간을 상상한다.
오답을 지워내자면
내가 가진 자격이나, 소유하고 있는 것들
사람들의 평판과 명예..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외모와는 다른 기준을 주님이 가지고 계신다.
특정하기는, 일상의 태도와 그의 마음의 방향이다.
일상의 태도, 곧 반응과 믿음에 관힌 이야기가 아닐까?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안디옥 교회는 예배드리며 
금식하는 일도 일상이었던 것 같다.
금식하던 때에 성령님은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서 맡길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반응했다.
원어에는 ‘토테:바로 그때’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령님의 말씀에 즉각 반응한 그들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그 시간.
나는 바로 그때 주님 앞에 반응해야 하며
주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은 흔히 내가 주님과의 
깊은 사귐의 시간이거나, 중요한 지점일때다.
그 일상의 때, 이 본문을 읽으며 
금식에 대한 마음을 생각한다.
 
워낙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감각을 절제함으로
삶을 단순한 형태로 바꾸고, 주님의 신호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지점에는
악한 영의 공격 또한 거세어 지기 때문이다.
 
구브로(키프로스)라는 섬에서
그는 그 땅을 통치하는 서기오바울을 만나게 된다.
그는 진리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지역의 선교전략에 주요 인물이기도 했다.
이에 바예수라 하는 유대마술사가 사역을 방해한다.
바울은 성령충만하여 그를 대적했다.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행13:11)
 
주의 손이 우리에게는 힘과 방패가 되지만
동시에 주의 손이 대적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주의 손이 우리에게 있을 때도 여전히 현실의 어려움이 있지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16:33b)
승리는 오늘과 내일이 아니라,
이미와 아직의 문제이다.
결국 믿음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