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바람

작년부터 구치소에 사진을 전시하게 되고
재소자 자녀와 사진교실을 열고
교정위원으로 위촉되어
교정위원 전문화 교육을 배우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 이렇게 하고 있지.
낌새를 차릴 겨를도 없이
정신차려 보니 나는 어느 순간
이쪽에 발 디디고 서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
하나님이 부시는 바람에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인도해주세요.

보이지 않는 선

매일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지난 일기를 다시 들여다 보기는 할까?
생각하지만 지난 시간동안
주님 주신 마음으로 일상을 기록하며
내게 얼마나 풍성한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쁘다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쉼도 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우선순위. 그 시간속에 나는 넣어 두었습니다.
바쁘다고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최소의 시간을
나는 우선순위에 두었기에 나머지는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한정된 시간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을 처리하느라 
급급하다면 나는 정작 중요한 일을 뒷전으로 둘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다면 나는 보다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과의 보이지 않는 선과 정서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보이지 않는 선은 
그냥 둬도 괜찮은 것일까요?

같이 기도하자.

사람들은 우상을 만든다.
서로 잘 하고 있다고 응원하고 격려한다.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못을 단단하게 박아서 고정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나의 종, 이스라엘아

그들과 비교해서 하나님은 ‘그러나’ 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 조언을 듣고 행동하는데
과연 나는 어느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과
우상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못을 박아 고정하는 것과

온유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이야기했을 때
겉으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내 마음에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만큼 자라서 생각할 나이가 되었구나.
인지적인 이해 너머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그러다가 우리는 매일 기도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설명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아가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기도외에는 이런 문제를 풀어낼 방법이 없다고 믿는다.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그 체험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실제적으로 주님을 만날 시간을
기다리며 기도한다..

불완전한 세계속에서

처음 신학을 공부하라 말씀하셨을때
나는 수많은 의문과 질문을 던졌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있고 목회자가 있는데
내가 여기에 숫자를 더할 필요가 있느냐고.
 
차라리 조금 더 도움되거나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내 질문에 주님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에 기초일 뿐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신학이 믿음을 담보해주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이해하는
수많은 프레임이 있다는 것을, 
전부인듯 말하는 것 속에
수많은 허점이 있고
진리라 말하는 것 속에
수많은 허울과 싸움이 있음을,
이런 불완전한 세계속에 완전한 주님의 통치가 있음을,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인생 속에 만나게 되는
여러 고통까지도 순응하게 됩니다.
 
언젠가 기도중에
아주 힘든 시기를 경험하게 될거라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이 일인가? 지금 이 시간인가?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당시에는 전혀 힘든 시간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힘든 시기를 경험하게 될거라는
주님의 마음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생각하면
내가 보내고 있는 힘든 시기. 그것조차도 
주님의 주권, 주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린 예수님에게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마리아가 성전에 올랐을 때 노선지자 시므온이 말했습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눅 2:34)
 
헤롯의 위협 앞에 도망하고
사회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당하고
결국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미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리한 칼로 마음을 이리 저리 찌르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녀의 인생 속에 만나는 고통에서도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이 그녀를 숨쉬게 하지 않았을까요?
 
알 수 없는 인생, 주님 말씀해주세요.
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깨어나곤 합니다.
지난 시간, 선택, 살아온 과정들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오늘 내 인생에 다시 주님을 초대합니다.
계속된 인생의 질문들을 오늘 또 묻습니다.
주님, 가르쳐주세요.
말씀해주세요. 인도해주세요.

실패의 흔적

계획했던 일이
잘 이루어졌으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은
나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반면에 실수나 실패는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만듭니다.
 
백퍼센트 진행될 것 같은 일도
먼지 같이 작은 문제가 원인이 되어
그르치는 일들도 여럿 경험했습니다.
십 여년전에 각각의 다른 출판사에서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출간이 1년 이상 연기되거나 
출판 자체가 무산된 적이 있었습니다.
 
두 번 모두 원고와 디자인까지
완성한 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후
감정도 다 정리되었고
지금까지 선생이 되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잘 이루어지고, 성공한 일은
앞을 지시하고, 더 속도를 내게 하는 반면,
실수나 실패는 
내게 멈추어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과연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합니다.
 
오늘의 나는 실패를 두려워 하지만
실패를 경험한 후에
그 실패는 감사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들때면

어느 날, 
문득 두려운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
걸어가는 길과 선택
막막함과 불확실성

그때 생각합니다.
내 꿈이 자아성취라면
금그릇이 되지 않을까?
은그릇이 되지 못할까?
하지만 내 꿈이 여전히 예수님을 향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은 그저 과정일 뿐입니다.
실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정만 존재할 뿐,

두려움이 생긴다면
나는 다시 기도하면 됩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면 나는 오늘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할 일은 많은데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어서 누워야 하는데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 주님.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게 감사합니다.
오늘 불안하고
오늘 슬픔을 생각하지만
내 생애는 오늘이 전부가 아니기에
다행입니다.

하지만 내 생애 오늘이 전부인 것처럼
주님을 갈망합니다.
주님, 주님..

후천적인 자폐아

아이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말은
멋져 보이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통해 후천적인 자폐아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일반적인 답안을 줄수는 없겠지만
이 아이를 주님께 묻지 않으면
아무도 답을 말해줄 수가 없다.

아이의 마음에 항아리가 있다면
주님 원하시면 향료나 값비싼 재료가 아니라
그저 물을 부어 채우겠습니다.
주님이 잔치 마지막날 최상급의 포도주로 사용해주세요.

역설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고전 3:18)
?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도리어 어리석은 자가 되라는 역설을 말하고 있다.
?
당시는 누구의 제자와 이론을?
따르는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아볼로의 제자다, 나는 게바의 가르침을 따른다.
나는 바울의 전통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아볼로, 게바, 바울과 같은 인물들의
제자가 되려 하지 말아라고 하신다.
?
너희는 바울의 것이 아니라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다 너희의 것이다. 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의 것이다.
?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나는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계가 내게 속해 있다.
그리고 그 세계를 군림하는 형태가 아니라
섬기라 말씀하신다.
이 역설적인 명령 앞에?
앞서 걸으신 분이 누구이신가?
?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