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인은 누구신가

누구에게나 주님이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다.
돈과 명예와 멋진 디자인과 선망의 대상과 의지할 무언가.
바울도 자신의 주님을 믿고 있었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열심을 내서 자신의 주님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대적하고 핍박했다.
 
하지만 그는 정보의 빛보다
밝은 빛 앞에서 질문해야 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행26:15)
정오의 빛은 가장 밝은 빛이지만
그 빛 보다 더 밝은 빛이 비추었을때
그는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세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생각하지도 못했다.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가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바뀌게 되었다.
삶의 방식과 방향과 자신안의 믿으믜 구조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새롭게 방향을 설정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탄 배의
방향을 설정하셨다.
“이제 너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
그들이 죄 용서를 받고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할 것이다.” (행26:18)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저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앞으로의 역할을 
말하는데, 이 한 절속에 수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
눈을 떠서 제대로 된 진리를 알게 할 것이며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죄사함을 받고, 거룩함을 입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이 약속.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이전의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에 가깝다.
바울의 3번에 걸친 신앙고백속에
변화가 있다.
누가는 무엇을 강조하려는 것일까?
이 고민을 위해서는 먼저 
성경은 그림에 가깝다는 말을 이해해야만 한다.
 
 

딱히 죄목이 없다

바울은 아그립바왕과 소문 많은 여인 버니게 앞에
서게 되었다.
지금은 재판이 아니라 비공식접견이다.
 
베스도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을 이제 로마황제에게 보내야 하는데
그에 대한 공식적인 죄목 하나 없기 때문이다. (행25:27)
 
여기에 답이 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많은 사람들과 대제사장을 포함한 
유대인 무리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유대법으로도 로마법으로도
딱히 죄목 하나 달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는 단지 베스도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것.
그 한 가지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
때문에 받게 되는 불이익, 고난, 수모..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다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는다.
 
예수님으로 인한 불이익은
수치가 아니다.

살아간 것을 말하라

벌써 2년이 지났다.
바울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갇혀 지내고 있다.
풀려나가기만 하면 자유일까?
그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유대인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새로운 지도자가 왔지만
그또한 이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위의 문제들도 그대로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축 내는 것 같아 보이지만
분명 기점이 있고, 변화가 있다.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다. (행25:11)
적법할 수 있지만
억울하다고 누구나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을것이란 사실은 상식적이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죽기를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행25:11)
사람에게 죽음이 가장 두렵지만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죽음보다 크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로마로 갈 것을
말씀하셨다.
 
바울은 자신의 말에 대한
상당한 대가지불이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스도인. 자신의 말에 대한
대가지불이 필요하다.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3주간 코스타 강의를 간다.
그곳은 항상 주눅이 드는 곳이다.
쟁쟁한 강사들이 청년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고 귀를 기울인다.
그곳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내가 아닌 멋진 말이 필요하지 않는다.
나는 책임질 수 있는 
여전히 함께 하시는 주님이어야 한다.

바울과 벨릭스의 2년

바울은 2년간 감옥에 갇혔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계획이 있지만
자신의 게으름이나 부족함과 상관없이
상황에 눌려서 그는 2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에게 이 시간은 과정이다.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참기 힘든 시간이다.

벨릭스에게 잘 보이는 방법이 있었다.
그는 계산에 능한 사람이다.
노예출신이었지만 귀족의 딸을 취할만큼
계산적인 사람이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무죄였던 그는 충분히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몸의 자유를 얻는 대신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 여전히
신앙 양심앞에 반응했다.

사람에게는 여러 마음이 있다.
그리고 크게는 두 마음이 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
그렇지 않은 마음은 돈으로 집중된다.

돈은 권세가 있어서
우리의 삶을 바꾼다.
당장 우리 취향을 반영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디자인과
조금 더 쾌적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악과는 정확하게 연결되지 않지만
취향을 보다 개선시킬 수 있다는데서
외면하기 힘든 욕구이나 권위이다.

물론, 돈 자체가 죄는 아니며
그 자체가 악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울은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
두려웠지만 그는 두려움보다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과
바울이 가져올 뇌물을 기대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다만 당장 촉각적이고 필요한
유익에 내 손을 가져다 대기 때문이다.
마치 팥죽을 탐내는 에서의 마음과 같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명을 하고
나도 변명이 있다.
삶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과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할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의 순간에 단순해야 하며
조롱받을 위기를 감당해야만 한다.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낄 것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행24:16)
 
바울은 변호사 더둘로와 대제사장 앞에서
그리고 총독 앞에서 자기를 변호한다.
나를 고발할 자격이 있는 자들은
이곳에 없다. 그리고 나는 양심을 따라
행하고 있다.
 
양심을 따라 행한다는 말은
죄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한결같이 변하지 않아야 하며
끊임없이 변해야만 한다.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마음이며
변해야 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따라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고
또 재판이 연기가 되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며
복음을 이야기한다.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자기 편이 없는 싸움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사는 총독 벨릭스의 구미에 맞게
바울을 고발했다.
 
로마 당국에게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사람(행24:5)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 말한다.
지금까지 바울의 행적을 보면
이를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나를 변호할 수 없을때
그래서 궁지에 몰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바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기 편이 없는 곳,
일대다의 싸움. 그것도 전문적인 공격과
부인할 수 없는 고발앞에서
그는 의지할 대상이 한 분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한분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린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때에도
선한목자되신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그곳에서도 살 수 있다.

역사와 시간은 의도를 품고

성경의 인물들은 기다림과 물음이 있다.
특히 다윗의 인생이 그러하다.
언제까지 입니까? 
기름부음 받았지만 그는 연인 도망을 다녀야 했다.
하나님이 부재한듯한 이 시간속에서
다윗은 서른살이 왕이 되었다.
나는 어느 길을 걷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가장 빠른 길로 인도하고 계셨다.
 
왕의 길과 전혀 다르지만
왕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 바울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하나님은 그를 로마로 데려가길 뜻하셨다.
그리고 이제 바울 그 자신과는 무관하게
천부장과 총독등 로마의 관료들을 통해
그는 많은 병사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넘겨지고 있다.
 
천부장은 총독 벨릭스에게 편지를 한다.
그가 실수한 부분은 서신에 담지 않은채
편집과 의도를 통해
단순하지만 선명하게 편지를 작성하고 전달한다.
이 편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인이며 그는 죽을만한 사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지만
그는 죽을 죄목이 없다는 것을
천부장은, 그리고 누가는 지난 행적을 통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뜻하셨는가?
그렇다면 때로는 정치적이고 
우리 의도와 상관없는 주변의 상황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이루시길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왕이 되기 위한 길일수도.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일수도.
일상 속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일수도.
문제.같은 주변 상황이 주님의 부재를 말하지 않는다.
문제를 통해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길 원하시는가?

이름 모를 청년 한 명

대단한 컨퍼런스에 참석한 일이 있다.
나는 기질상 작은 테이블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는데
한 목사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대단한 목사님 한 분이 들어오셨는데
나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던 목사님은
나를 팽개치고 그 분에게 눈과 몸의 방향과 마음까지
쏟았다. 정말 쏟는 것 같았다.
자주 보는 풍경이었으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힘있는 사람, 자신을 도와줄 사람에게
사람들은 온 정성을 쏟으며 자신을 어필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역사속 많은 이야기에는
바울같은 사람 뿐 아니라 
그저 청년으로 기록된 사내들을 통해
역사의 흐름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40명의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스스로에게 저주의 맹세를 씌우면서까지
결연한 의지를 품은 무리들이 있었다. (행23:12-15)
지금이 아니라 당대에 그 정도의 의지를 가진
숫자가 모였다면
바울은 다음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정상이지만
 
바울의 생질, 청년 한 사람이
이 모의를 알게 되고 바울과 백부장과 천부장을 
거쳐 이 사실을 알리게 된다.
결국 바울은 호위병 470명과 함께 가이사랴로 향하게 된다.

어찌된 전개인가?
알 수 없지만
내가 주목하는 몇 가지는.
이 흐름의 전개에는 이름모를 청년 한 명이 있다는 것과
이 사건이 있을 전 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행23:11)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지만
감사한 일은, 주님의 말씀이 우선이었다는 사실이다.
담대하라.
 
주님이 내게 두려워말라, 담대하라 말씀하시면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씀앞에 반응하리라.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았다

“나는 오늘까지 모든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행22:1)

바울의 말에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했다.
바울의 말, 곧 선한 양심으로 살았다는 말은 무엇일까?
그는 사도행전에서 이미 본 것처럼, 그의 서신서에게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처럼
죄인이며 실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았다는 말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실수를 했을 경우에
다시 선한 양심을 따라 다른 선택을 한다.

자신의 입을 치라고 한 사람이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행22:5)
대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얼마전 한 회사의 CEO를 인터뷰했는데
그는 법과 가치와 규범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오래된 전통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기준이다.
기준이 없다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사회 속에
기준으로 정해져 있는 권위 자체를
붕괴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이라는 진리가 빛처럼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기존 무리들은 철저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공회에서는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 사이에 분쟁이 생긴다.
이 무리들 속에도 각자의 기준이 있다.
기준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기준과 법이 진리라고 믿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혼란의 밤,
그날에도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다가와
말씀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행22:11)

주님이 길을 인도하신다.
잘 가고 있는 게 맞는가?
이 혼란속에 나는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밤에 주님은 바울에게 그렇다고. 잘 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나침반이 아니다.
주님이 나의 갈 길을 말씀하신다.

역사의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야

말씀이 중요하다 해서
말씀만을 집중하게 되면
메마르고 건조함을 느낀다.
그러면 기도와 영성을 강조하게 된다.
기도하고 기도하다보면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 집중하게 되면
무엇인지 빈약한 기초를 느끼게 된다.
 
개인의 영성과 구원을 강조하다 보면
사회적 영성과 공동체와 사회정의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쪽과 저쪽, 저쪽과 이쪽을 
두루 경험하며 한 쪽의 논리와 생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힘의 균형들을 보게 되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주권,
도대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을까?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이 가지고 있는 로마시민권은
매번 로마인으로 하여금
그의 신분를 보장받게 된다.
빌립보의 감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도 그는 특별한
신분을 확인받게 된다.
 
마치 암행어사출두를 외칠 때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바울은 사건의 초기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 타이밍은 항상 바울에게
가장 유리한 지점만은 아니었다.
손해 보지 않을 타이밍에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적절한 타이밍.
복음을 전하는데 문제 없을..
 
나의 정당함을 매번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다.
바울에게 복음이 우선순위에 있었던 것처럼
내게는 무엇이 우선순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