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천적인 자폐아

아이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말은
멋져 보이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통해 후천적인 자폐아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일반적인 답안을 줄수는 없겠지만
이 아이를 주님께 묻지 않으면
아무도 답을 말해줄 수가 없다.

아이의 마음에 항아리가 있다면
주님 원하시면 향료나 값비싼 재료가 아니라
그저 물을 부어 채우겠습니다.
주님이 잔치 마지막날 최상급의 포도주로 사용해주세요.

역설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고전 3:18)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도리어 어리석은 자가 되라는 역설을 말하고 있다.
 
당시는 누구의 제자와 이론을 
따르는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아볼로의 제자다, 나는 게바의 가르침을 따른다.
나는 바울의 전통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아볼로, 게바, 바울과 같은 인물들의
제자가 되려 하지 말아라고 하신다.
 
너희는 바울의 것이 아니라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다 너희의 것이다. 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의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나는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계가 내게 속해 있다.
그리고 그 세계를 군림하는 형태가 아니라
섬기라 말씀하신다.
이 역설적인 명령 앞에 
앞서 걸으신 분이 누구이신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

오늘을 그렇게 보내며

매일의 하루를
웃으며 보내다가도
내 마음에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대단한 기도제목이 아니라,
평화의 때에 전쟁을 준비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전쟁의 때에 한가한 하루,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그립고
그 하루가 그렇게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내가 보내는 하루, 하루
너무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하다면
전쟁의 날에 이 날을 
그리워 할꺼라는 마음으로
오늘을 감사합니다.
오늘, 오늘을 그리워 합니다.

복잡한 결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의 삶을 보아도
그는 예배당안에서 거주한 것이 아니라
전쟁터와 아비멜렉 앞에서
침을 흘리며 위기를 모면했을때조차
주님과 함께 상황과 삶을 풀어 나갔다.

지금의, 신자본주의 시대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노골적으로 성공과 돈을 취하는 것으로 향해있다.
믿음을 택할 경우, 상당부분 손해가 예상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결국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경제적인 생활 자체를
부정하거나, 예배당안에만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골적으로 맘몬을 섬기는 이 시대에
믿음을 통해 살아가는 것은
단순하지만 복잡한 결을 따라 걷는 걸음이다.

하루, 힘내자

하루 하루, 내 안에 머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란다.
왜냐하면 하루 하루의 연장이
바로 너의 인생과 같으니까.

하지만 
오늘 하루을 바라보고
모든 것이 결론난 것처럼 생각하지도 말아야 해.

단 하루일 뿐이야.
내일은 또 다른 하루를 만들어 낼거니까.

심지어 그 절망을 통해
절망의 끝에서도 너를 만날꺼야.
절망의 끝은 너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니까.
너의 절망으로 절망하지마렴.
너의 절망의 끝에 내가 일하는 것을 만나렴.

두려움

두렵다는 말,
내 마음 한 부분에 두렵다는 생각,
나는 두렵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어쩌면 두려움 때문에 더욱 주님께 매달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키워드가 두려움이 아닌
주님께 기대어서
주님의 품안에서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
주님과의 사귐이 키워드 였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살아 갈 때는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함께 살아 갈 때는
끊임없이 배워 나가는 것 같습니다.
인생도 알게 되고, 부족함을 알게 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두려움을 알지 못하면
인생을 알지 못하고
인생을 알지 못하면
누군가를 체휼 할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도전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만나는
매일의 두려움 마저도
내겐 감사여야 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인생 속에서 어떻게 처리해 가야 할지 
모를 일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은 마치 고슴도치와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럴때 마다 내 마음은 가난해집니다.
가난해지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데도
내 마음은 한없이 가난해집니다.

내게 아무것도 없구나.
과연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내주하시는 주님, 성령님
내게 선한 것으로 채워주세요.

부드러운 말과 따뜻한 무언가로는
만들어 지지 않는 주님의 나라.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준비해 나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논문은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

이제 논문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들어서 수업이 있는 월요일부터 
다시 학교에 나가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논문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이 마음이 어떻게 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질을 생각하면 이 마음도
주님이 허락하신 은혜라는 생각에 
순종하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월요일에 학교에 나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두려움이 생겼다. 
다시 어떤 기초를 가지고, 어떤 타임테이블과 
어떤 주제로 준비를 해야 할까?
너무 막연하다는 두려움.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 두려움의 가장 중심에서
기도. 한 단어가 피어올랐다.
그래.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야고보서에 말씀하지 않았나?
이른 아침도 아니지만 
조금씩 시간 약속을 스스로에게 정하고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열어가며
주님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주 안에 자랑하라

세상은 자기에게 도움 되는 이들을
가까이 하고, 요구한다.
언젠가 큰 컨퍼런스에서
각자의 테이블에서 강사들이 서로 교제를 나누던 중에
영향력 있는 목사님이 등장하시자
나와 함께 나누던 대화 내용은 증발해버리고
나는 오랜시간 투명인간이 되어 버렸다.

마음에 상처를 받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전까지 내게 자신의 정치력과 영향력에 대해 호소하셨던 분이라
자신의 장점을 백분 활용하시는 거라 이해했다.

나중에 나와 교제 나누던 목사님이 
강의를 시작했는데, 
겸손에 대한,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의 따라 
사람의 중심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그런 메세지가 전혀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세상은 서로를 도구화한다.
자신에게 도움 되는 사람을 찾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도구화 하지 않고
무능력하기만 한 내게 먼저 찾아오셨다.
내가 나를 부끄러워할 때도
마음이 경화되어 냉소적일 때도
어김없이 찾아와 내 눈물을 회복시키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그 시간을 기억하기에
주님이 나를 만지신 시간을 생각하면
모든 결과들을 나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과정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래야 누구로 부터
비롯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기록되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습니다.” (고전 1:31)

 

주님을 그리워 합니다

가족들이 마주 앉아 
얼굴을 그려주고 한참의 시간을 웃으며
한 해 있었던 일들,
경험하고 자란 것들을 적어 보았더니
꽤 많은 목록이 되었습니다.

구구단을 외우고 되었고
성경 말씀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 여행도 함께 했고
이런 저런 상도 탔습니다.
책도 많이 읽었고
제주도 오름도 올랐습니다.

브솔시내에서 무리들에게 
다윗이 나눴던 말이 생각납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을 이기고 난 후
사람들은 싸우지 않은 사람들은
노획물을 가질 권리가 없다 말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이긴 것은 
하나님이 싸워 이기게 한 것이기에
싸운 자나 싸우지 않은 자나 공평하게 
나눌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을 나를 중심으로 이해하면
감사하거나 기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비교대상이 존재하고, 세상도, 인생도 
불평할 것 투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결과에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나는 브솔시내에서 멈춰 선 자이고
노획물을 가질 자격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선물로 주신 시간을 돌아봅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으나
주님 만날 때는 얼굴과 얼굴을 보는 듯 하겠지요.
온유에게 왜 거울로 보는 것 같을까? 물었더니
옛날에는 돌같은걸로 거울을 만들었으니
희미하게 보인다는 뜻이잖아.
아. 더이상 가르칠 게 없습니다.
어떻게 알았냐 물었더니 언젠가 제가 설명해주었답니다.
말해준 사람은 벌써 잊었는데 기억해주어 기특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보는 날. 주님을 그리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