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지혜를 주세요.

수영이를 위한 전시,
어찌해야 하나?
여러 고민이 있다.

한 사람을 통한 주님의 메세지,
그리고 그 한 사람을 통한 주님의 일하심을 믿는다.
다만 이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수영이는 혼자 보낸 시간이 길었다.
그리고 수영이에게 책을 만들어 준다면 참 귀한 선물이 될 것 같다.
수영이에게는 기억에 남는 시간뿐 아니라
나중에 수영이가 계속 글을 쓸 때 실제적인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보고 달려가다가 과정을 소홀히 하게 될까 두렵다.
상처가 있는 아이라, 자신을 위한 시간에서 도리어 상처 받지는 않을까 조심스럽다.

나는 이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움직이려 애쓰는 편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 천성이 드러날것 같기 때문이다.
원래 이 기간은 아프리카를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여러 가지 일로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취소하고 말았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보다 더 서두르는 것 같다.
하지만 날짜가 정해져 있으면 더이상 미룰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숙제와 마감날짜를 정해준 것이다.
하지만 이때문에 과정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다면
수영이에게는 도리어 상처를 주지 않을까..

주님의 지혜를 구한다.
주님의 지혜로 이 일을 잘 결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일을 위해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고,
함께 고민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케줄이 어긋나게 되면
나 혼자 치뤄야 할 구멍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난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 지혜를 주세요.

성소에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중 후배는 대화중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선배는 책임감때문에
더 부지런히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혼자일 때는 책임지지 않아도 되어서
무엇하나 아쉬울 게 없다.
주님으로 충분할 때도 아쉬울게 없지만
원래 목가적인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기에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리 욕심내지 않고, 또는 천국을 침노하지 않고도
불평하지 않고 살아가는 성격이다.
그런데, 가정을 이루고 나는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있기에
원래 내가 가진 기질보다 힘을 내어 일을 도모할 경우들이 있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내게 무거운 짐과도 같지만
이 무거운 짐은 내 성격에 반하여 열심을 내게 한다.

내가 만나고 섬기는 사람들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회복되는 것을 보게 된다.
만나기 전에 나는 늘상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다.
내가 만난다고 무엇이 변하겠어.
그런데 만나고 그들을 섬기다 보면
작은 변화와 회복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주님이 하신 일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하는 편이다.
사람들과 있으면 피로해진다.
하지만 주님은 내 환경과 여건을 만드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아버지의 뜻과 결부하지 않으면
나는 나를 피로하게 만드는 이 환경을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고난과 광야의 시간은
결국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이다.
나는 그 광야속에 나를 내어놓는다.

성실하지 않는 내게
책임감이라는 옷을 씌우시고
나를 향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면
나는 기뻐함으로 그 길을 걸어가리라.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도망한 유다광야에서
성소에서 주님을 바라본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성소는 구별된, 거룩한 곳을 뜻한다.
뜨거운 바람과 마실 물 찾기 힘든 척박한 땅이지만
주님의 뜻이 거하시는 곳,
주님이 나와 함께 머무시는 곳,
장소를 너머 그 모든 시간은
주님의 성소입니다.

믿음 믿음

어제 늦게 자서인지 많이 피곤하네요.
주님 수많은 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려주신 게 도움이 되어요.
나를 덮을 것만 같은 수많은 일들이
나를 두렵게 할지라도
실제라는 그렇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를 덮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이미 죽었다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내가 다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은
내 성향상 약속을 지키지 못한 때문에 마음에 불편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엄밀한 의미로는
내일은 내것이 아니예요.
내일은 내것이 아니기에
오늘의 수고로 족한것 같아요.
주님, 매일의 삶이
때로는 두려움이예요.
신용카드가 그런것 같아요.
갚아질 지 모르는 무언가를
믿음으로 긁는것이잖아요.
하지만 저는 막연한 무엇을 믿고
위축되거나 경직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
믿음이 필요해요.
내가 두려워 할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가 잘못된 믿음은 아닐까..
가끔은 그것을 생각하게 되어요.
주님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내 생을
내 좋을데로 해석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아마도 많은 부분에서 그렇겠지요.
하자민 주님, 내가 주님 안에 거하겠습니다.
내 발에 주님의 말씀으로 비추어주세요.

예수님 목마릅니다.

‘결혼’에 대한 원고를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신없이 써내려간 글이라 뒤죽박죽 불안했었는데
읽어가는 동안 주님이 주신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방에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거실 저편에서 온유가 나직히 말합니다.
“아빠, 그러면 물을 마셔.”

온유는 어제부터 종일 그림을 그립니다.
몇 년이 지난 월간다이어리를 노트로 사용하라고 주었더니
칸칸마다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그 페이지들을 뜯어다가 전시하면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뒤로 그려놓은 것들은 아까워서
한면만 그리라고 얘기하려다
그러면 의식하게 될까봐 그냥 두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랍니다.
날마다 감사한 일상.

연애일기

어제부터 주님과의 대화를 다시 적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쓰던 일기와 차이는
일상을 점검하는 형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주님과의 대화를 적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대화를 하면
늘 고민하는 것이
이것이 내 생각인가, 아니면 주님의 생각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려면

주님과 어떤 사업을 시작하려는 동업자의 태도가 아니라
주님과 연애하듯 사귀는 마음이면 됩니다.
주님과 대화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막대한 실수와 시도를 해야 한다면
그것으로 인한 부담감이 크겠지만
주님과 연애하는 마음이면
이 일로 인해 내가 조롱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사귐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꿈결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아빠, 난 나중에 커서 나비가 되고 싶어.”
“나비? 왜 나비가 되고 싶어?”
“나는 하늘을 날고 싶거든.
하늘을 날아서 새도 보고 싶고, 열기구도 보고 싶어.
그것 말고도 보고 싶은게 많이 있어.“
“그래? 또 뭐가 보고 싶은데?”


“비. 하늘에 비가 가득 모여 있는 걸 보고 싶어.
구름도 보고 싶어.
구름이 비를 어떻게 만드는지도 보고 싶어.
아빠, 난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어쩌면 좋지?“


다섯 살 난 딸아이처럼 나도 날개를 달아서
하늘을 날고 싶습니다.
보고 싶은 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것 중에서도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어젯밤 꿈속에 만난 것보다 더 선명하게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언젠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언젠가 목회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목사안수를 거절한 후로
목회에 대한 생각을 접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멘토와 같은 이들은 잊을만 하면
그 주제를 이끌어 냈습니다.

아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안에 작은 소원들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장은 아니어도
주님 말씀하시면 그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을 잘 준비하자고 서로를 응원했습니다.

아내와 나누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
기쁨을 느낍니다.
아내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만 주님 앞에 온전하면
우리 가정을 통해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는
어떤 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그 때, 나는 기쁨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내 마음에 묶인 흑암의 세력들을 빛으로 몰아내소서.

선해 보이는 것과의 싸움

말씀에 순종해서
아내를 사랑하려고 결심했을 때,
가장 갈등했던 부분이
선해 보이는 것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작업하려 들 때 조차도,
주님께서 그 시간에 원하시는 것이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또는 설거지 하는 것이라면
나는 작업이나 사역을 내려놓고
설거지 하거나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픔의 이유는 모르지만

지난 주말즈음부터 이리?저리?마음이?불편했다.
봄을?타는?건가?

여전한?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하나님의?나라를?꿈꾸는데
왜?이렇게?나를?잡아?끄는것들이?많은가?”
이?질문에?대한?답은?이미?확인한?바다.
이게?현실이라는?것이다.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데
수많은 장벽들이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다.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 이 땅은 영적 진공상태이거나, 비현실적인 이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물리적인?환경외에
추가적인 질문은
마음의 문제이다.
‘내?마음의?문제는?왜?이런가?’
‘물리적인?환경은?나를?몰아세워도
그냥?내?마음은?늘?평안하기만?하면?되지?않을까?’
‘지금 내?마음은?왜?이럴까?’

사람들마다?불편할?수?있는?여건은?모두?다르다.
내 경우에는 오해받을?수?있는?상황.
특히?나는?정당하지만?억울한?상황에?대해서?힘들어 할 때가 있다.
어쩌면 자기의가 많아서일 수도 있다.

어쨋든, 그런 연유에서 나는 다윗의?심정을?보다?잘?이해할?수?있었다.
사울왕에게?쫓긴?것?까지는?이해할?수?있지만
나발처럼 자신의?마음을?훼손하는?모욕에?대한?부분은?참을?수?없어서
다윗은 부하들에게 칼을?차라.?라고 분개했다.

또는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기는 십여년의 시간을 보내며
사무엘에게 기름부음받은 사실을 아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주님을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나선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른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리 저리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까?
내?마음이?불편할?때?이런?생각이?들었다.
과연 내?마음이?불편하지?않았다면 두 가지의 유익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한 가지는
‘나는?기도했을까?’
나는?불편한?마음을?가지고?끊임없이?기도한다.
마음으로도, 내 입술로도 끊임없이 주님을 찾는다.
오?주님..
끊임없이?주님의?이름을?부른다.
심지어?잠꼬대로도?나는?주님의?이름을?부른다.
그것은?이?땅에서의?한계와?동시에
내?마음을?아시는?주님에?대한?갈망이다.

물론?불편하지?않는?마음으로도 여전히 나는?주님을?노래할?수?있다.
꼭 고난과 아픔을 당해야만 기도하는가?
보통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그?절박함과?절실함은
우리가?인간인지라 전혀 다르다.
결국?이?불편함과 부족함이?주님을?향한?나의?갈망을?더해가는구나.
고난이 나의 구원을 더하여 주는구나.
주님을?더욱?바라보게?만드는구나.

나머지 한 가지는,
이?마음?때문에
나의?허기?때문에 누군가를 이해할?수?있거나 위로할?수?있는?것이다.
그것은?마치 ?내 상함 심정을
성경속의 다윗의?심정을 통해 살피고 위로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왜 이 마음을 허락하셨는가?
이런 두 가지 유익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왜나하면 거미줄처럼 얽혀진 수많은 상황과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이유속에는?말 그대로?거지같은?내?성질이나 실수들이?있을?수?있다.
하지만 이 속에서도 여전히 신실하신 주님을 바라보기로 한다.

시편 63편은 다윗이 유다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다.
이 시는 아마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급히 도망했을 때 지은 시일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절에 자신을 왕이라고 표현하는 등을 봐서
그가 사울왕에 쫓겨 다닐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광야에서 고난을 겪은 적은 압살롬의 경우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 곳에서 우리가 춤추며 찬양할 때 불렀던 바로 그 노래를 지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나이다.”
그는 원수의 멸망이나, 왕궁으로의 복귀,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자. 곧 언약적 사랑을 노래하며
주님의 이름을 노래했다.

다윗이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광야로 쫓겨났지만
그의 영성은 광야에 이르렀을 때 다시 생기가 돋기 시작했다.
그는 광야에 있었지만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처럼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광야이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성소다.
이 성소라는 말은 원어로 <코데쉬>라는 말인데
거룩한 장소, 구별된, 거룩함 같은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삶이 비록 누추하고 절망 가득해 보이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삶의 터전과 이곳이 바로 거룩한 곳, 성소가 된다.

잘했다는 칭찬

동성애를 다룬 영화를 감독한
김광진감독을 인터뷰하고 촬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곳곳에 각각의 분야와 주신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전에 덕규형의 교수실에 앉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설명하기 힘들다 말했습니다.
한 분야에 집중하여서 역량을 강화하는게 좋을것인지
작년부터 자주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돌보고, 말씀을 전하고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때에 어떻게 연결지어질까?
과연 연결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연결되지 않아도
전략적인 포지션을 잡지 않아도
드러나지 않아도
나는 주님 한 분이 보시고 ‘잘했다.’칭찬하시면 그만입니다.

이제 작업을 마무리하고 씻고 자려고 합니다.
방 너머에서 아내의 기도소리가 들립니다.
기도하는 아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