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자랍니다.

주님, 아이들이 자랍니다.
온유의 질문도 다양해집니다.

기도할적에 생각을 해도 되는지를 묻습니다.

‘기도하면서 기도에만 집중해야 하는지
기도하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해도 되는지..’
꽤 흥미로운 질문인 것 같아서
급히 핸드폰으로 담았습니다.

“아빠, 그러면
기도하면서 천국을 생각해도 되지?
그것도 하나님이 보여주신거야?”

“응. 기도하면서 천국생각하면 되지. 왜?”

“그것도 하나님이 보여주신거야?
옛날에 (기도하면서) 천국봤다는 것도
내가 생각한건데..”

“맞아. 하나님이 보여주신거야.
그때 천국이 어땠었어?”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는데..
주니어 네이버에 나오는
알라딘 이야기의 성과 비슷했어. 완전.”

“도상이 상상력의 근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말이 어렵지?”

“무슨 말인지 이해시켜줘.”

“너가 눈으로 본것들이
너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의 기초가 된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할수록..”

아이들이 보고
경험한 것들은
마치 나니아의 옷장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여는 통로가 된다고 믿습니다.
기도하며 천국을 생각한 아이가
그곳에서 아슬란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온유는 처음으로 어와나를 참가했습니다.
특유의 힘빠진 표정으로 어와나를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데려다 놓았는데 마칠때는 신이 나서 돌아왔습니다.
어와나를 통해 온유가 말씀으로 훈련받기를 기도했습니다.

밤에는 타이머를 이용해서
10분만에 정리를 마치기 미션,
20분만에 잠자리 준비하기 미션,
1분동안 열심히 웃기미션등.. 타이머를 통해 아이들이 자기주도로 행동할 수 있는 놀이를 해보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미션성공입니다.
주님 주신 지혜를 어떻게 응용할지 기대가 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주일은 다들 피곤했던지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제 저의 고민과 해야 할 일이 시작됩니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찢긴 마음으로 내 안에 주님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봄이 오는 것 같습니다.

주님,
봄이 오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를 다녀와서 몸과 마음이 겨울을 보내고
오늘 다시 기지개를 펴봅니다.

주님의 타이밍은 놀랍습니다.
논문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러시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주님이 내게 작은 마음을 주시네요.
작다 여기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수십년을 눈앞에 것을 듣고, 보고 살아와서인지
무엇을 계획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주님이 오늘 주시는 마음을 따라 살겠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주님 가르쳐 주세요.

투웬티프로젝트도 다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진행되기 위해
조금 더 수월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재료를 다듬었고, 기초를 덮었습니다.

지난달에 붙여 놓은 작업스케줄에는 항목을 17개나 적어 놓았습니다.
주님, 필요한 것과 해야할 것들은 하게 해주시고
걷어내야 할 것은 걷어내게 해주세요.

주님, 이 모든 것이 자아성취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마치 내 꿈을 이루는 것 같아 보여도
주님이 나를 향한 계획, 그것을 이루어주세요.
그래서 종국에 주님의 뜻이 성취되고
주님이 영광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브엘세바를 찾아서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나는 그 일에 피의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나와 관련없는 글에도 나는 혼자 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렇게 아플적에는 내가 쓴 글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내가 쓴 글을 다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을까?

우리는 각자 의도하지 않게
서로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아니고서는 스스로 설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이 아침에 내 마음은 더욱 주님을 갈망한다.

눈물없고 아픔없는 주님의 나라를 꿈꾼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해야 하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상처 입을까봐 무리들을 피해
혼자 걸어가고 있다.

나는 또 하나의 선택을 했다.
신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의 부담감을 따라 선택하고 걸어간다.

좋은 혜택과 유리한 고지는
너희들 가져라.
나는 나의 우물을 파리라.
그 우물을 막고 메워버리면
나는 또 다른 땅을 찾아 우물을 만들고
또 우물을 만들고..
주님, 브엘세바에 까지..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

사역 발표를 맡아서
스토리텔링으로써가 아니라
작업의 전후 맥락과 말씀의 배경과 상관없이
지난 작업과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삼십분이 넘는 시간을
가득 채운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무엇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너무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영적 중압감이 가득했던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사진과 글, 강의와 그림과 여러 사역들
나는 사역을 이야기하면서
그 전제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전제가 흔들리게 된다면
내가 하는 사역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내 시간과 돈과 수고를 들여가며
보낸 수많은 시간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이 땅을 지지하고 있다면
때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시간조차도
나는 그저 주시는 말씀과 마음에 순종하면 됩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이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라 말하는 것은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내  연약함과 여러 가치관과 모남들이 모든 결정과 과정에서
수없이 얽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나는 그저 오늘을 살아가면 됩니다.

사랑하는 것

온유와 소명이의 이야기를 나누면
사람들의 반응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사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직접 키워보면, 살아보면
사랑스럽다는 말보다 짜증이 치밀 때가 많습니다.
이젠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려 하고
동생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예쁘지 않은 말이나, 버릇을 보이기도 하면
그것을 고치려고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것은
우리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야단 맞아 울지만 다시 내 품에 파고드는 이유는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줄 알기 때문입니다.

예쁘고 아름답다

우리 아이들은 꽤 늦게 잠자리에 드는 편이다.
아무래도 아빠가 집에 돌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내일을 준비하느라 이것 저것 정리하다 보면
밤 12시를 훌쩍 넘기게 된다.
성장 호르몬이야 어찌되었건
아이들 스스로는 알바 아니다.
아무래도 늦게까지 놀다보면
자기 체력의 한계를 넘어갈 때가 많다.
그래서 아주 늦은 밤에 씻기고 양치를 하려면
가끔 아이들 잠투정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
어제는 온유의 잠투정 때문에 결국
다 큰 아이를 침대에 눕혀서 양치질을 도왔다.

“나 임신했을 때 오빠가 나한테 이렇게 했는데.”
그모습을 보던 명경이 내게 말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내는 임신 후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때는 직장에 다니던 시절이라
퇴근후 골아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가 상할 까봐 아내를 달래고 달래다가
침실에 바가지를 들고 와서 양치를 시키고, 바가지에 입을 헹궈서 침을 뱉게 했다.

당시에는 남편이라, 아내를 돌본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지금은 두 아이를 돌보느라 둘 다 동역자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는 내가 아빠가 되고, 아내가 딸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내만 엄마고, 나머지는 다 아이들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더욱 사랑해 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는 요즘 유난히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찍어준 사진을 보면 예전에 비해 많이 늙었다는 말을 하곤 한다.
나는 여전히 아내가 예쁘다고 생각한다.
결혼 한 후 시간이 흐를 수록 내 눈에는 더욱 예뻐 보인다.
만일 아내가 늙었다면 그건 아이들을 돌보느라 그렇다.
그렇다면 아내의 늙음은 곧 아름다움이다.
내게는 언제까지나 예쁘고 아름답다.

봄을 기다리며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마17:4)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해같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러시아 코스타에서 청년들은 주님의 은혜 앞에
엎드려 기도했고, 뜀뛰며 찬양했다.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지만 어김없이 산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한숨이 가득하다.
때때로 미소짓고 웃어보지만
내 안에 허기짐을 만나게 되고
어찌할 수 없는 상한 심령으로 몸부림친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의 영혼의 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경험한 사람은 그 기쁨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주님을 갈망한다는 것이,
주님과 함께 거한다는 것이
어떠한 영광과 기쁨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기억하며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대조를 이룬다.
모세와 엘리야를 대신해서 강도 둘이 있었고,
이곳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는
누군지 알지 못한다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났다.
너무나 상반된 이 풍경속에서
예수님만은 변함이 없으시다.
예수님은 영광스런 자리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내다보시고
십자가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신다.

우리는 영광스런 자리에서
주님을 고백하지만
고난의 자리에서 주님을 부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적절한 좋은 환경을 구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도
주님을 바라봐야 할 것인가?
믿음은 무엇인가?

통회하는 심령.
마음이 아플적마다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
현실은 이상적이지 않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 시간을 주신것이라면
나는 겨울을 보내는 나무처럼 살아가야 한다.
봄이 올 것이다.

목자 없는 양

나는 자주 고통하며 두려워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뒤척이다 잠을 깨곤 한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 으로 시작하신
주님의 약속위에 서서 살아보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은 자주 나를 압도했다.
어쩌면 내가 만난 아픈 사람들과 절망스런 풍경들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 마음에 스며 들었던 것 같다.
주님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고 고백하지만
희망을 찾아 보기 힘든 풍경에서 과연 위로를 말할 수 있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약간의 역전과 우연들이 겹치지만
현실에서는 냉혹함과 쓸쓸함이 남을 뿐이다.

그런데, 이 아프고 절망스런 풍경에서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맹인과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고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마9:35)

하지만 다 돌보지 못할 만큼
당신의 백성은 아파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마음이 급하셨다.
추수할 주인이신 하나님께 추수할 들판으로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할 것을 제자들에게 요청했다.
왜냐하면 당신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기진하였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창자가 뒤흔들릴 정도로
고통하시며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그 제목은
다음 장면에서 바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마10:1)
기도하고 곧바로 성취된다는 말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갈망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주님은 아픔이 있는 곳마다 두루 다니시고
돌보셨을 뿐 아니라
일꾼을 위해 기도하라 말씀하시고는
스스로 당신의 제자들을 일꾼으로 보내셨다.
이 급박한 전개속에
주님의 마음이 녹아져 있다.
나는 절망, 나를 불확실성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에 나를 고정해야 한다.
그것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리라..

 

이 마음을 주님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 때
가끔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왜 내 마음은 들여다 볼 생각을 하지 않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기운 빠진 사람을 위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 하다가
문득 기운 빠진 내 마음을 보게 되었다.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고
나는 누구보다 아픈 마음인데
사람들은 내 마음은 천하무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생길 때면
이 마음 주님께 올려드린다.
주님이 갚아주실 것이니까.
내가 다른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
이 마음을 주님께 온전하게 올려드리며
나의 구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와

비 오는 날, 우동을 끓여 먹었습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상을 펴면
소명이가 맨 먼저 아기 의자에 앉아 음식을 기다립니다.
냄비에 우동 하나 내려 놓으면
소명이는 “우와” 하며 좋아합니다.

우와 소리를 듣는데
아내가 내게 말합니다.
“우와. 소리를 들으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는 것 있지?
내가 해주는 건 그냥 밥 위에 멸치 얹어주거나,
파프리카 하나 주는건데.
다른 엄마들은 얼마나 아이들에게 잘해주는데
나는 고작 이걸 내주는데
우와. 소리를 들을 때면 참 미안하고 아이들에게 고맙고 그런다?”

우와. 소리를 듣게 되면
좀 더 아이들에게 잘해야겠다. 는 다짐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