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꼭 해야 할 것들이 많다

11월까지 마무리해야 할 글이 있다.
약속이자, 사명감으로 책상앞에 앉아야 하는데
나는 우선 마음에 있는 것부터 풀어놓아야
그 다음 일을 할 수 있는 성격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늘 일과 시간에 부딪힌다.

시간이 부족해.
라는 말은 자기경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변명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꼭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사명감을 위해 뛰다 보면,
돌보아야 할 우리 아이들이 뒷전이 된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절박감이 있다.
내가 아이들을 잘 돌봐주는 자상한 아빠는 아니지만,
어제는 잠자리에 누운 온유의 수다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온유야, 어제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유치원에서 돌아온 온유를 붙들고
내가 궁금한 딸의 일상을 물어보아도
딸은 내 질문에 단답으로 끝나버릴때가 많다.
하지만 어느 때는 자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끝없는 이야기를 풀어 놓을 때가 많다.
나는 진정시키고 아이를 재워야 할 것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아이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그 무한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다르다.
그래서인지 꼭 해야 할 일들이 자꾸만 늘어만 간다.
내게는 정말로 시간이 부족하다.
잠을 줄여서라도 나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말 것이다!!
주님 도와주세요.

바쁜 하루,

오늘도 새벽 두시 반,
무척 피곤하지만 감사한 일이 많다.
바쁜 일들을 해나가지만, 아프리카에 우물 만드는 일도
조금씩 진행중이다.
아직 누구에게도 이 일에 대해 후원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혼자서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아내가 피곤해서 낮잠을 자려다가
내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피곤하면 눈을 붙이면 되지. 하고 웃었다.
정말이다. 나는 내가 피곤하다고 아내와 가족들이 함께 피곤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야 나도 언젠가 편히 쉴 수 있지 않을까? 하하.

작업 스케줄을 하나 둘 종이에 적어나갔다.
12월중에 모두 마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22가지의 프로젝트와 해야 할 일이 ?한 꺼번에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몇 가지를 포기했어야 하는 걸까?

원고도 써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진도가 안나가고 있어 큰일이다.
그래도 네팔 캘린더는 이제 작업의 중반을 마쳤다.
투웬티 프로젝트는 이제 액자를 찾으러 가면 된다.
곧 여명학교 졸업사진도 찍어야 하는데, 먼저 말도 못 꺼내겠다.
여러 가지 일을 함께 진행하느라 컴퓨터 세팅도 자꾸만 늦어지고 있다.

저녁에 살짝 부담감과 함께 짜증이 있었다.
서둘러 마음을 살피긴 했지만
할 일 때문에 내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기를.
주님 도와주세요.

이런 시간

모든 잠든 밤,?두 시가 지나서야 이제 잠자리에 누우려 합니다.
더 버티려다가 내일 아침 일찍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나마 일찍 접었습니다.
마음 한편에 밀려가고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한
고민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에 아이들과 잠시 시간을 가졌습니다

숨바꼭질 아주 잠깐, 무궁화 꽃이 아주 잠깐,
레슬링 여러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에 대한 압박이 있지만
그렇다고 아이들과 보내는 잠시의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흘려 보내면
그 시간들이 쌓이면 안타깝게 후회할 것 같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가장 아쉬울 것들을
지금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막연하지만 이런 저런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도리어 내게 행복이 피어납니다,
말씀을 짧게 읽고 눈을 감으면 스르르 잠들겠지요

할 일들..
주님 주신 은혜의 경험들.. 감사합니다
그 신뢰가 오늘을 순종하게 합니다

컴퓨터 리빌딩

컴퓨터가 한동안 블루스크린이 뜨는 등
잦은 고장으로 작업이 이어지질 않았는데
친한 후배와 친구의 도움으로 어젯밤에 컴퓨터 세팅을 마쳤다.
데이터를 백업하며 새벽 3시까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내 주변에 이런 사랑스런 친구들이 있다는게 새삼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보다 사교적이지 않다.
카톡에는 이천오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등록되어 있지만
일년동안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내가 만나서 도와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일시적인 만남에 그칠 뿐이다.
지속적인 연락은 도리어 생색내는 모습으로 보일까봐
지레 걱정하는 성격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좁은 바운더리 안에서
시간을 두고 연락을 주고 받고
도움을 주고 받는 사람들.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사람들이다.

기존에 내가 작업해 놓은 과정까지
다 백업이 되면 좋으련만,
거기까지는 무리라서 정상적인 작업을 하기까지는
또 한동안 신경써야 할 것 같다.
감사하다. 매 번. 일상들이.

오늘은 잔칫날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읽기 좋게 정리해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잠언으로 묵상을 시작하자, 이 일을 계속해 나가기가 곤란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주제를 따라 흘러간다기 보다는
각각의 개별적인 해석과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어서
한 절, 한 절의 말씀을 개인이 고개 끄덕이며 묵상하면 될 일이라서
거기에 대해 부연하는 것이 의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 지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기도와 성경 말씀을 함께 나누는 것이
자신의 고된 삶에 단단한 갑옷과 무기가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다시 말씀을 나눠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잠언은 지혜로운자, 그렇지 않는자,
지혜를 찾는 자, 어리석은 자를 대조하며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고난 받는 자는 다 불행하고,
마음이 기쁜 사람은 매일이 잔칫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잠15:15)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절반은 불행한 자일까요?
주변에 있는 귀한 사역자들은 대부분 불행한 자일까요?
성경의 한 편에서는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 받는 자는 도리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고난과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고난을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고난 받는 자가 지칭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이 상한 자, 어리석은 사람이
감당하는 고난을 지칭합니다.

마음이 기쁜 사람과 고난 당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예를 다음 구절들에서 이야기합니다.
“재물이 부족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큰 재물 때문에 고민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 풀을 먹으며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면서 살진 송아지를 먹는 것보다 낫다.” (잠15:16,17)
세상의 잣대에는 재물이 부족한 것, 풀을 먹으며 사는 것이 고난이지만
성경은 도리어 큰 재물이 있지만 고민하며 사는 사람,
살진 송아지를 먹지만 서로 미워하는 사람을 고난 당한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외국에서 무척 마음이 상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주님은 내게 ‘나로 인하여 기뻐하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낙심한 마음과 바뀌지 않은 상황속에서
나는 그 명령에 순종해서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기뻐하는 감정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내 영혼에 명령했습니다.
“내 영혼아 기뻐하라, 주 여호와로 인하여 내 영혼은 기뻐하라.”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지옥과 멸망도 여호와 앞에서 드러나는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느냐?” (잠15:11)
누가 내 마음을 알까?
우리는 자주 아파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신다. 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영혼들이나 가는 지옥(스올)도
죽음의 자리와도 같은 멸망(아바돈)도
우리에게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넘어선 그 공간이 주님앞에는 훤히 드러납니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을,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시98:4,7-8)

 

그곳이 어디인들

지인의 결혼식 때문에
대구에 다녀왔다.

오랜시간동안 공동체를 위해 충성하느라
자신의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귀한 영혼,
마흔이 넘어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다.
그 소중함을 알기 때문일까?
지방에 떨어져 살던 사람들이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많이도 찾아와서 축하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른다.

결혼식을 마치고 카페에 모여 나눈 대화들,
나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데
자매들이 아내 명경에게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아내는 갑작스런 질문에 이런 저런 대답을 했고
시간이 지나 대화에 합류했는데
많은 도움과 도전과 힘이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아내가 내게 어리둥절하다며 이야기했다.
내가 아내에게 해준 대답은
“너의 말이 특별히 대단한 것이 아니라
너가 삶을 살았기에 너의 말에 힘이 실리는거다. ”
라고 이야기했다.

모두들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간 흔적은
길을 만들고
걸어간 길은 또 다른 누군가가 따라가기 마련이다.
길이 아닌것처럼 잡초가 무성한 이유는
아무도 갈만한 길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길을 걸을 때마다
과연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하지만 막상 방을 내딪으면
그때서야 알게 된다.
안전해 보이는 길만이 길이 아니라
믿음의 도약을 내딪었을 때
그 길은

…..

기도모임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주체하지 못할 만큼 울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렇게 만들었다.

알고 있었지만,
기쁜 것은
우리가 모이려고 했던 카페에 자리가 없어서
누군가의 아늑한 집에 모였고
자연스레 말씀과 기도가 이어졌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우연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그 길을 걷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자리이다.

모든 시간속에 아버지의 뜻이 녹아져 있다면
카페 어느 한 구석에서도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리라.
그 곳이 어디인들..

사랑과 인내

아침에 지인에게서 기도부탁을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납득하지 못할 사람들, 이성적이지 않은 반응들.

도대체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일상이 일상같지 않은 상황들을 연속해서 만나게 되면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말입니다.
오늘 바울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것을 권면합니다.

이 곳 뿐 아니라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할 것을,
악을 악으로 갚지 말 것을 지속적으로 권면하는 이유는
우리 주님은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갚으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살후3:5)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인내,
과연 우리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도달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오늘의 상황들을 통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조금이라도, 조금씩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나를 사용해주세요.

무척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내게 속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글을 나누는것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글을 쓰고,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을만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개라도 참고하고 분별해야할 자료들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어깨는 결리고..

하지만 감사하다.
기다리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를 사용해주세요.’
소비되는 것이 슬픈 말인 것 같지만,
기다리는 일은 그것만큼 힘든 일이다.
주님께서 기다리라 말씀하셨을 때 기다리는 것.

다윗은 그것을 했고,
사울왕은 그것을 하지 못했다.

교회를 향해 차를 몰며
얼마나 찬양했는지 모른다.
말로 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했다.
주님, 주님..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