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왕의 왕이 오셨네.
왕이 나셨네.
기쁜 이 날에
세상 만물아,
주께 엎드려 찬양하고 경배하라.

찬양하고 경배하는 곳마다,
주님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가장 누추한 내 마음에도

성탄의 기적이 날마다 이루어지기를…

오늘 아침

며칠동안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고
사람들을 만났다.
인천에 있는 청년들은 희철이의 친구가 되어주기를 약속했고
장로님과 여러 사람들은 여러 형태의 도움을 약속했다.

희철이 어머니는 결국 자신의 수술은
취소했다고 한다.
물론 다시 예약을 하면 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본인은, 자신을 위한 수술보다
희철이를 위한 도움과 수술이 가장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일하심을 생각했다.
내가 여러 상황들을 미루어 생각하고
결정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며칠사이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인가

오전에 병원에서 만나고
여명학교에서 아이들 졸업사진을 찍어주기로 했다.
벌써 일년이구나.
매번 연말에는 몸도 바쁘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으로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을 설명한다.
곧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우리를 둘러쌀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주님, 주님이 너무 보고 싶어요.
아픔 많고, 절망 가득한 세상을 만날 때면
주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나는 현실주의자

주님,
살아가는데 수많은 얽매이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싶은데,
선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현실속에 나를 잡아 끄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마음은,
그게 현실이다.
얽매이는 것 없이 날아가게 되면
그것은 이상주의로 끝나버린다.
삶의 질척거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삶의 정황들은 자꾸만 최악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주님의 놀라운 승리로 반전된 것처럼
우리 삶의 구석구석도 그런 모양을 갖는다.
실패처럼, 최악처럼 비치는 상황속에
내가 바라봐야 할 분은 주님이시며
내가 선택해야 할 태도는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둔 터널을 걷고 있더라도,
그 길을 주님이 함께 걸으신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길은 무엇인가.

 

그래, 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지극히 현실주의자다.
그 현실을 지배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주의 날개그늘아래

요즘 마음이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힘들다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 마음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것을 느낍니다.
다윗의 마음이 아니라 사울의 마음인가 생각합니다.

나는 나를 정의롭다 의기지 않습니다.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수많은 비판과 평가를 들이대는 것을
주저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의롭거나 공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은 공의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모든 것을 깨닫는다.” (잠28:5)
악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공의는
하나님과의 입장차이 일것입니다.
자신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모든 것을 깨닫습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정의와 공의에 대한 결정권을
주님께 올려드린다는 의미와도 같아 보입니다.

스스로의 선한 의도들이 곡해당하는
수많은 상황속에서
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 숨겠습니다.

주님, 나는 정의롭거나 공의롭거나
긍휼이 많다거나 인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입니다.
주님의 품에 숨겠습니다.
나를 안으소서.

고통 하는 인생속에서.

인생이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극도로 피곤해 하는 것은
마치 경쟁하듯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마흔이 되면서
관념적이던 구름이 조금 더 선명한 형체를
띄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 무엇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을
무엇 무엇이 아니다. 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각자의 인생이 있는데
왜 비교하며 살아가야 하는걸까?
왜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걸까?
‘왜 너는 이 아이와 같지 않느냐?’
주님도 내게 그것을 비교하거나 탓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비교해야 하는걸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화살들을 맞으며
가끔 고통하게 된다.
피로함.
그렇게 뿜어져 나오는 한숨.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고귀한 인생이 아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그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본다.
나는 예술가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성자의 삶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주님, 이 길을 인도해주세요.
손 잡아주세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영광이 어울리지 않으니
그것은 마치 한여름의 눈이나 추수때의 비와 같다.” (잠26:1)

잠언의 말씀 한 구절, 또 한 구절이 두렵습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님,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영광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여름의 눈과도 같습니다.

내 지난 모든 시간들을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내 말과 글을, 사람들앞에서의 실수들,
내 삶의 궤적들을 조금씩 수정해서
주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길로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눈 앞의 선택과
내가 옳다고 여긴 방법들
그 모든 것들이 나중에 주님 앞에서
어떻게 평가될까 두렵습니다.

주님, 사람들의 평가에 두 가지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나는 나로 인해서 주님이 수치를 당할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림자도 없는 완전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나로 인해 주님이 마치 부족한 것처럼 인식될 까봐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질까봐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낱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유한한 인간인가요.
나는 늘 그것을 고민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은 말그대로 사람들의 평가가
나를 찌를때 입니다.
나는 생각마다 여린 사람인가봅니다.
그래서 속을 긁으며 아파할 때
언젠가 주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나는 전혀 의롭지 않지만
주님, 나와 함께 걸어주세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영광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제게 주님이 거하여 주세요.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며 기뻐하게 해주세요.
나의 만족의 기준이 주님께 가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지혜를 주세요.

하루동안 헉헉대며 많은 짐을 날랐다.
빌라 오층높이에 살고 있어서
용달로 짐을 나르시는 분도, 함께 돕는 나도 다리가 후덜거렸다.
그냥 걸어서 올라가는것도 힘들때가 있는데
스무박스 이상을 날랐더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육체노동의 힘겨움을 연말마다 느끼게 된다.

하지만 캘린더가 잘 나왔다.
박스를 다 나르고 처음 열어본 순간,
지지대와 Band와 여러 구성품들이 세련미가 있었고
원했던 감성까지 담았다.
지지대의 두꺼운 질감위에 박이 얹혀진 느낌도 좋았고
펜에 새겨진 인쇄도 만족할만했다.
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오늘 약속이?이렇게 저렇게 변경되면서
후배가 아이를 데리고 방문했다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놀고, 어른들은 뜻하지 않게
종일?함께?일하게 되었다.
감사한것은,
일하다 묵상한 것을 나누고
일하다 묵상한 것을 가지고 또 기도했다.
일하던중에 러셀실버증후군으로 아픈 찬영이와
영상통화도 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연출하신 뜻밖의 시간들도 보내게 되었다.

함께 동역하는 후배에게서 메일이 왔다.
미안한 마음이 나를 흔든다.
하지만 웃으며 격려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는 열등감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열등감이랄것도 없을만큼
내가 가진 특별함을 찾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끔 잊을때도 많지만
두려움은 내게 두 가지의 생각을 던져준다.
하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데도 쓸데 없는 나,
또 하나는 자격없는 나이기에 주님, 나를 사용해주세요.

그래서 나는 참 많이 울었다.
사람을 만나고, 사진을 찍으며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귀가하는 버스안에서
아주 작은 일을 하고 있을때
창문에 기대어 눈물을 쏟았다.
나도 할 수 있는게 있네요.

내가 그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미안함이 나를 흔들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으로 위로할 수 없는 이유는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자. 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기도하자라는 말은
무한한 우주로 뻗어나가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나는 십오년전에 이렇게 기도했다.
가치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가치있는 일들을 해내고 싶습니다.
가치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나는 그들과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혼자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주님, 지혜를 주세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밤에,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며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라는 질문이 생겼다.

하나님은 심판으로 인해
옷을 찢고 애통해 할 것을 명하시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신다.
나아가 두려워하지 말고, 네 손에 힘이 빠지지 않게 하라고 명하신다. (습3:16)
3장 밖에 되지 않는 성경 속에서
이렇게 냉탕과 온탕을 오가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하루 24시간 밖에 되지 않는 시간속에서도
울고 웃고를 반복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 않은가?
하루에도 침노와 기쁨과 애통을 반복하는게 연약한 우리 인생이다.

오늘 말씀은 그저 평면적인 서술로만 읽히지 않는다.
성경을 지으신 분은 시간의 주인이시다.
그래서 성경이 선포될 당시의 대상을 너머
포로에서 돌아올 이스라엘 백성과
마지막 종말론적 회복까지 주님은 내다보고 계신 것이다.
주님의 시선으로 오늘을 살게 되면
나는 애통해 하지만, 동시에 기뻐할 수 있으리라.

“그때 내가 다리 저는 사람들을 구해내고
쫓겨난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습3:19)
다리 저는 사람들, 쫓겨난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겠다고 하신다.
만일 스스로 구원을 생각할 여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구원은 자신의 능력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서 이루어냈다고 여기겠지만,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구원 받기에 자격 없는 자라고 여기면?

“네, 주님 저의 연약한 인생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다리 저는 사람이며, 쫓겨난 사람입니다.
감히 왕의 잔치에 함께 할 수 없는 자입니다.

하지만 내가 주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고
손에 힘이 빠지지 않게 하고,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습3:15)

그 분이 내 안에 계시지만,
나는 종종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력감을 느낄때가 있다.
왜냐하면 그때는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실뿐
그 분을 전혀 자각하지 않고
내가 왕이 되어 내 가운데 있거나, 그 분을 조종하려 들기 때문이다.
초청하라. 반응하라 내 영혼아.
주님이 주인된 삶.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 (습3:17)

주님을 생각하라.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라.
바쁘고 쫓기는 일상속에 멈춰 서서
주님을 얼굴을 구하라.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나는 주님의 장단에 맞춰 살겠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베데스다’는 예루살렘의 양문 곁에 있는 연못이다.
치료의 효력이 있는 간헐천으로 알려진 곳으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의 아람어 베티스다의 음역으로 베데스다 라고 말하고 있다.
자비의 집이라는 뜻의 이 연못은 실제로는
무한경쟁사회와 양육강식의 사회의 축소판일 뿐이다.
병에 걸린 사람들-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환자들-은
이 곳에서 혹시 있을 기적을 선점하기위해 기다리고 있다.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동료인것 처럼 대기하지만
만일 물이 움직이게 된다면 모두가 경쟁자가 되고 말 무자비한 곳이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이 이곳을 누구보다 먼저 차지할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 있지만
대안은 생각할 수 없어서 그저 이곳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자들이 모두 소원하고 있는 이 곳은 전설일 뿐이다.
4절의 내용- 주의 천사가 물을 휘저어 놓을 때,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다 나았다는-이
괄호로 표시된 이유는 요한복음의 많은 사본(가장 오래된 사본 포함)에는 이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병자들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대상에
자신의 인생을 드려 끊임없이 구원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뿐 아니라, 이 시대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대상에게 구원을 요구하고 있다.
얼마전 사람들의 하루를 다큐멘터리로 촬영해서 보여주는 프로에서
건물주들의 풍족하고 나른한 하루를 방영했다.
넉넉한 건물세로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신이 부럽지 않을 사람’이라는 나래이터로 맺음했다.
이 시대의 구원은 이런 형태인가?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그가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는 알지 못했다. 구원자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똑같은 기도를 우리는 매일 예수님께 드린다.
“예수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요5:7)
친구들과 가족들, 직장동료들과 사회시스템과
은행의 한도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거라” (요5:8)
하지만 그 모든 한도에 예수님은 구속되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는 ATM인출기는 아니다.
오늘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베데스다에는 셀 수 없을 만큼의 고통하는 병자들이 있다.
이 땅에서의 고통은 여전해 보이지만
우리는 38년된 병자의 치유를 보며 누가 구원자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어나라’ 는 말은 보통 신약성경에서 부활을 상징한다.
그 분이 죽으시고 사망을 깨뜨린 사건, 때문에
나는 오늘 살아가고 있다.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5:1-9)

내게 하나님은 어떤 분?

원고를 쓰다가,
말씀을 먼저 묵상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급한 것을 먼저 하다보면
중요한 것은 늘 뒷전이 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스바냐는 요시야왕의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원인은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열거하다가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에게도 맹세하는 자들’을
심판의 목록에 넣습니다.
말감은 어린아이를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행했다고
성경에 기록되는데, 밀곰, 혹은 몰록으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동시에 우상에게도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지인은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너무나 다급할 경우에는 무당을 찾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처럼 명확하지는 않아도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신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돈이라는 우상앞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돈 앞에 기도하지는 않지만
돈에 기대어 마치 신을 대하듯 신앙적 결단을 못내리고 있는 모습도 발견합니다.

선지자는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할것이라 말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요.
다시 표현하면, 기도하지 않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문제들을 현실적인 방법으로 풀어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지금으로 확대해석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을 아주 좁게 해석해 내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면 무리일까요?

마음대로 살게 놔두세요.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땅의 문화는 내 마음을 이리 저리 흔들어 놓습니다.
그저 좋은게 좋은 것 같습니다.
경직되어서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영적 싸움에는 깨어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선을 행하지도 재앙을 내리지도 않으신다’
라고 마음에 말하는 사람을 내가 등불을 켜들고 뒤져서 찾아내 벌하겠다. (습1:12)
내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분이십니까?
그 분을 믿지만, 혹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입니까?
나는 깨어야 합니다.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