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부럽다, 그의 말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함께 한 이들에게 내가 당신들에게
이렇게까지 수고했고, 헌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절대 말할 수 없는 말들이다.
하지만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들 또한 이 말들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자신을 본받아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제 이곳으로는 다시 오지 않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언제 그가 목숨을 다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가지, 더욱 낯선 곳으로 들어갈 뿐
정들고 익숙한 이곳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동시에 성령님은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고난과 박해라고 말한다.
언젠가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거라고.
그런데, 거짓말처럼 이 말을 듣는 순간
원망이 아니라 
언제가 힘든 시간이지?
지금인가? 지금이 그때인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바울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의 
고난과 박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주님이 말씀하셨기에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거라고 확신했을런지 모르겠다.
 
그는 말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전하는데 있어서 내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명보다 복음이 더 귀하기 때문.
시대적인 언어에 코드를 맞추는 것과
복음이 동일선상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문화적인 것이 복음 위에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 생명보다 예수님이 귀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록에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무교절 후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행20:6)
누가는 바울과 복음을 전하며 여행은 한다.
넘칠대는 파도위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의사출신 답게 세세하게 일정과 경로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소요가 끝난 후
마게도냐로 떠났다.
누가는 행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바울은 이 때를 생각하며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는 줄 알았다’고 말한다.(고후1:8-9)
 
그들의 위대한 여행을
다 말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적다.
그 짧은 지면속에
유두고라는 청년 이야기가 서술된다.
다음 날 떠나는 바울은
밤중까지 강론을 계속했다.
당시는 주일이 쉬는 날도 아니었기에
일하고 온 무리들은 피곤하지만
집중해서 그 시간을 함께 했다.
 
청년 유두고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 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죽었지만 그는 살아났다.
마치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린 것처럼
바울은 그에게 엎드려 안았다.
큰 슬픔이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궁금하다.
당시의 모습을,
땀내 나는 그들의 모임.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
그리고 날이 새기까지
다시 말씀을 강론하는 모습.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계에
지쳐있었겠지만, 그 속에 어떤 희망일까?
 
생명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값주고 사신
영혼의 가치앞에 모두는 위로를 얻는다.

데메드리오의 의도를 군중은 알지 못한다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동종업계의 사람들이 외부인들의 영향으로
업종을 변경하게 되었고 이 무서운 경제적 타격은
곧 자신에게도 들이닥칠 것 같았다.
지금의 금융중심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똑같은 일이 에베소에서 벌어졌다.
은세공업자로써 아데미 여신의 은모형을
만드는 사람으로써 관련 업계의 중심이 되는
데메드리오라는 자가 이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마술사 그룹이 자그마치 5만 드라크마의
직무와 관련된 도서를 불에 태워버린 사건은
곧 신상을 제작하는 업계로 불똥이 튈지 모른다.
그래서 군중을 모아 외쳤다.
“아데미는 위대하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행19:28)
거의 두 시간을 소리쳤고, 도시는 순식간에
온통 수란스러워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외쳐 소리지르는 이들중 태반은
왜 모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행19:32)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많이 모였다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뜻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발전하면
시대의 언어를 이해해야 하지만,
시대의 언어이기에 옳은 일은 아닐 수 있다.
예를 들면 권위에 대한 반기를 드는 시대는
지금으로써는 옳을 수 있지만
10년 전과, 혹 10년 후에도 옳은 것일까?
답은 알수없다. 이다.
 
그리고 많은 수가 긍정하는 일이
진리인가? 에 대한 질문에도 
알수없다.가 답이다.
성경의 많은 경우, 특히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간을 살펴보아도
진리의 싸움과 다수결의 싸움은 조금 구분된다.
 
그리고 이 모임의 핵심은
모인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데메드리오의 의도이며
그의 의도는 자신의 생계. 곧 돈이다.
믿음에 대한 문제와 맘몬과의 싸움이지만
군중에게는 가려져 있는 싸움이기도 하다.

주문이 아닌 능력이다

5년 전에 집에 더이상 책을 둘 때가 없어서
읽지 않는 책을 모아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버린 적이 있다.
그때 100여권의 책을 팔아서 10만원 조금 넘게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외식도 하고..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책을 모아 사람들 앞에서
불로 태워버렸다.
그 책의 가격은 모두 5만 드라크마 정도였다.
1드라크마가 장정의 하루 품삯이니
내가 알라딘에 팔고 받은 책값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거금이다.
 
돈은 하나의 권위이며 권세이다.
또 하나의 능력인데 자신의 존재이유와 같았던
마술책을 파는 행위,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불 태우는 행위는 하나의 행위예술이자
믿음의 고백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의 시발점이 있었다.
에베소에서 바울을 통해 특별한 기적이 있었다.
물론 성경은 그 특별한 기적이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행19:11)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천조각 하나라도 가져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마술하던 사람,
그 중에 대표적인 유대 사람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했했다.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령한다.”
여기서 명령하다라고 표현한
원어’호르키조’는 부탁한다. 애원하다에 가깝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애원하고 부탁했다.
 
악한 영이 대답했다.
“내가 예수를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
악한 영에 빠진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힘으로 눌러 이겨서
스게와의 아들들은 발가벗겨진 채 피를 흘리며
집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행19:15)
말 그대로 수치와 망신을 당한 것이다.
 
이 부끄러운 사건이 바로 마술사들을
예수님께로 돌이키는 시작점이 되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두려워함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의 악한 행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 능력 앞에
마술사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내려놓고, 불태우고
주님의 권세를 가시적으로 드높였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의 주문이 아니다.
주술로써의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
그 분 자체가 주권적인 존재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이제 바울은 제자를 길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만나는 세상은 제한되었지만
그가 기른 또 다른 사람들이 만날 세상은
보다 열려져 있다.
그 세계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이른 것이다.
바울은 두란노서원에서 
2년 동안 날마다 가르쳤다.
 
나는 혼자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행정과 조직이 미숙하고 불편한대다가
후원을 요청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기질때문에라도 혼자 움직이고
혼자 책임지는 편이 수월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나는 세상은 좁다.
만일 주님이 내게 또 다른 
무언가를 말씀하신다면
나는 내 선호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라 걸어야 한다.
 
바울은 그를 비난사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그만두고
또 다른 사역으로 전환한다. (행19:9)
자기 변명을 그만두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군대 입대할 때 주님이 내게 준 미션 하나가
바로 나의 정당함을 포기하는 일이다.
마땅한 자기 변명을 포기하는 대신,
바울은 두란노서원에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익숙한것과의 결별. 이라는 
유행했던 책이 있다.
주님이 원하시면
나는 날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한다.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

복음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넓은 스펙트럼이 있고

사람에게는 한 가지,
혹은 몇 가지의 단면만 볼 수 있다.

내가 가진 기질과 성격이 희귀해서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가끔 생각한다.
하지만 이또한 전체가 될 수 없으며
무척 작은 단면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넘어오며
그와 함께 오랜시간을 사역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동행했다.
에베소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하기를 청했으나
바울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거절할 수 있는 용기, 필요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굴라 부부가 그 자리를 맡았다.
 
그곳에서 부부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석학인 아볼로를 만난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
곧 주의 길을 예비하라, 곧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이 진리만 알고 있었다.
그에게 예수님을 가르쳤고
아볼로는 바울과 아굴라부부가 떠나온 자리인
고린도 교회를 찾아가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 (행18:27)
 
바울과 베드로만 유익을 주는게 아니다.
지금까지 진리를 알지 못했던 아볼로도
누군가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으며,
그 시작점에는 아굴라 부부의 수고가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린도에서 함께 동행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그 다음 사역, 그 다음 은혜가 있다.
 
지금 내다볼 수 없는 시간,
내게 주신 오늘의 순종과 만남.
그것이 중요한 이유.

말해야 할 때, 잠잠해야 할 때

바울은 이례적으로 고린도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었다.
지금 나의 상황, 우리의 상황이 어떤지는
다 알 수 없지만 갈등 가운데 멈추어야 한다면
또는 이동해야 한다면, 결정해야 한다면
주님의 말씀이 하나의 근거가 될 것이다.
 
어느 날 밤에 주님은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에
직접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대로 가지고 와도
문제 없을 내용도 있다.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의 근거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곧 임마누엘에 대한 약속이며
동시에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주 언급하셨던 말씀이다.
 
내가 두려워 말아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라.
왜냐하면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고린도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반대로 잠잠히 있어야 할 때는
홍해앞과 여리고 싸움 직전이다.
말해야 할 때와 잠잠해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한다.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 또한 중립적이다.
땅에서의 생명으로 국한한다면
이미 세례요한도, 사도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했으며
그리고 많은 사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해치지는 못한다.
나는 어느 나라 국적을 가졌는가의 문제이다.
 
두려워말라.
이제껏 핍박 당해서 생긴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 말씀하시면 순종할 의지와 여지를 가지는 것,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생각해야 할 점!!

오래 머무른 이유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반을 머물렀다.
다른 곳은 전도를 하다가 핍박을 당하고
급히 이동하느라 바빴는데
이 곳에서는 긴 시간을 머물렀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은 동역자를 만났다.
그들과 함께 텐트를 만들며
긴 시간동안 머무를 준비를 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난 후 바울은 그의 서신마다
그들을 언급하며 호의를 표한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인생의 동반자, 인생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냐에서 내려오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붙잡혀 라는 말은 완전히 지배당하거나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실라와 디모데라는 기댈만한 대상도 중요하다.
 
얼마전 터키선교사와 만나 이야기한 것처럼
무슬림의 지도자들은 흔히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터키에 있는 기독교지도자들이
생계활동 없이 종교생활하는 것을
업신여긴다고 말한다.
말그대로 팔자 좋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랍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바울이 텐트메이킹을 하는 게
특별한 모습은 아닐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은 그렇게 수고하지만
다른 사역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신과 같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고린도에서 바울이 오래 머문 이유를
여러 가지 추론해 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이 성에 당신의 백성이
많기에 머물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아침마다, 밤마다
묵상한 내용의 일부를
나누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도 주님의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순종으로..

시간의 거룩함 앞에서

아테네의 아르테논 신전이 있는
언덕, 아레오바고에 서서 바울은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한다.
 
같지 않은 두 철학에서 
각각의 접촉점을 찾아가며
예수님을 전한다.
 
내가 진심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예수님을 전한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분도 아니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신전안에 계시지도 않는다. (행17:24-25)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언젠가 조나단에드워드의 첫번째 논문의 주제
천지창조의 이유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수많은 논증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기 자신의 영광. 
우리가 이해하거나 다가가지 못할 그 완전함.
 
바울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었지만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조롱하였고
어떤 사람은 다시 듣고 싶다고 했다. (행17:32)
누군가는 바울의 실패한 설교라고 평하지만
순종. 그 자체가 성공이다.
 
그저 떨어진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 아니다.
사나 죽으나, 무엇을 먹던지 마시던지.
시간의 거룩함앞에 순종한다.

첨단도시 아테네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나는 공평하지 못한 것,
또는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처럼 대하는 것이 속상할 때가 있다.
이 말은 전통과 전통주의
권위와 권위주의의 혼돈과 같은 말이다.
분노는 좀처럼 하지 않기에
속상하면 꽤나 발전된 형태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우상으로 그 도시가 가득 찬 것을 보고
매우 격분했다. (행17:16)
성경은 합리와 실용등 또는 인격과 공평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이 있다.
 
십계명의 첫 번째가 그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
그 외를 사랑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아테네 뿐 아니라 내 안에도 가득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것으로 충만하기 까지 하다.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 이방인까지
그 곳은 온갖 새로운 것들을 

탐닉하기에 최적화된 도시다. (행17:21)

우리는 새로운 것, 멋진 디자인, 감성적인 것에
열광하고 있다.
나는 어디에 열광하고
어디에 분노하고 있는가?
이 싸움은 꽤 외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의 흐름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긍정하는 가치에
비껴선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외침을 기억하라.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이곳에 왔다” (행17:6)